* 린cha님 리퀘 <브루딕뎀 섹피 AU로 두 사람의 아이를 동시에 임신한 딕>

* 섹피 세계관 간단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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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를.


 서재 문 옆에 기대어 선 데미안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살짝 열려있는 문 틈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레이슨, 주인님, 자궁, 아이, 준비. 익숙한 단어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서재에서 아버지는 집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웨인 저택의 방이란 기본적으로 넓기 때문에 문 바깥에 서 있는 위치에서 온전한 하나의 문장을 듣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데미안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짤막한 단어만으로도 서재 안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해냈다.


 어두운 복도에 홀로 선 소년의 표정이 묘했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그레이슨을. 처음부터 몰랐던 것도 아니었지만 새삼스레 상처받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딕 사이에 켜켜이 쌓여왔던 시간에 대해 소년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오래전부터 정말 가족처럼 긴 시간을 함께 해왔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만이 데미안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대강 들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함께 있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에 대해 데미안이 느끼는 것은 자신은 결코 저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계를 평생이 걸려도 형성하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었다.


 웨인이 입양한 골든 보이. 핸섬한 마스크와 유머감각, 깔끔한 매너와 다정한 성품으로 인망이 높은 딕 그레이슨은 서커스 출신이다. 떠돌이 출신이 고담을 세운 명문가 웨인의 대문을 넘어 그 안의 일부가 된 일에 기구한 사연이 없을 리가 없다.


 딕의 가족이 속해있던 헤일리 서커스는 미국 각지를 떠돌며 예인들의 기술을 보여 관객의 열광을 받고 그것으로 돈을 벌었다.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발길 닿는 도시의 넓은 공터를 빌려 커다란 천막을 세우는 이들의 삶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중력이 없는 것처럼 가볍고 자유롭던 플라잉 그레이슨의 명성도 하루 아침에 깨어지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인간 본연의 탐욕 때문이다.


 헤일리 서커스가 고담에 도착했을 때 어떤 건달 하나가 서커스 단장을 찾아가 돈을 바치거나 자신의 일을 도와 위험한 물건을 다른 도시로 옮기는 것을 돕도록 요구했는데, 단장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에 앙심을 품은 건달은 서커스 단장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공중 그네의 밧줄에 산을 부었고, 곡예중이던 그레이슨 가족은 추락했다.


 그리고 그날 그 순간에 브루스 웨인이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레이슨 부부는 죽는 순간에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으리란 것이다. 수십 피트 위의 공중에서 떨어진 그레이슨 부부는 그대로 절명했다. 안전 그물도 없이 추락했다면 죽는 것이 당연한 높이였다. 혹여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평생 남을 부상이나 식물인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부부 사이의 어린 아들은 로빈이라는 그 별명대로 실로 어린 새와 같아서, 소년이 떨어지는 순간 관객들은 일순 소년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고 혼란스러워하며 진술했다. 


 일반인- 즉 원인(猿人)의 눈에도 소년의 모습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면 반류이자 극히 드문 고양이과 중종인 브루스 웨인의 경악은 대단했다. 딕이 떨어지는 순간, 브루스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푸른 새가 힘을 잃고 작은 날개를 허우적대며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원인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바닥에 떨어지는 아이의 모습은 분명히 새였다.


 살아남은 소년은 곧장 병원에 옮겨졌고, 브루스 웨인은 일면식도 없는 소년의 병원에 병문안 갔다.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제대로 된 첫만남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평범한 인간인 줄 알고 살아왔던 딕은 죽음에 맞닿은 충격적인 경험을 계기로 자신이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떨어져 죽었을 고도에서 추락한 딕이 살아남은 것은 딕의 본질이 새였기 때문이었다. '선조귀환'이었다. 이는 딕의 조상 중 누군가가 반류였다는 것을 뜻했다. 번식력이 뛰어나 오늘날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한 원인과 달리 반류는 수가 적지만 간혹 가다 이렇게 커다란 충격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있긴 있었다.


 입원중인 딕을 만난 브루스는 부모님을 잃은 것도 괴롭지만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전부 원숭이로 보여서 당황한 딕에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다짜고짜 다가와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는데도 딕이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깨어나보니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원숭이로 보이고 있었고 원숭이가 아닌 이들은 이따금씩 다가와 어린 딕을 만지작대며 금방이라도 덮칠 듯이 침을 삼키는 와중에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딕을 대한 것이 브루스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반류이며 흔치 않은 선조귀환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널 노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브루스는 설명했다. 선조귀환이 반류 세계에서 인기가 많은 것은 이들이 반류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원인들의 강점인 번식력까지 갖추었기 때문이다. 중종으로 갈수록 아이를 낳아 대를 잇기 힘들어지는 반류들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따금씩 불법적인 수단까지 서슴없이 해치우는 일이 있었다.


 어린애가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단어와 난해한 개념으로 가득 한 설명이었음에도 머리가 좋았던 딕은 금세 브루스의 말을 이해했고 그가 놓고 간 반류에 관한 어린이용 설명 책자를 몇 번이고 꼼곰히 읽었다. 그리고 이해했다. 자신만이 줄 끊어진 허공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것은 제게 날개가 있어서라는 것을.


 당시 서커스장 텐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원숭이 인간들은 반류에 관한 것을 눈앞에 들이대더라도 뇌가 그 모습을 인식하지 못 하고 보아도 못 본 것처럼 들어도 못 들은 것처럼 의식이 흘려버린다. 때문에 관객들은 눈앞에서 딕이 새가 되어 날개를 파닥인 모습을 보고도 눈의 착각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것이다.


 딕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고 침묵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딕은 자신과 함께 살지 않겠냐는 브루스의 제안에 곧장 승낙함으로써 브루스를 놀라게 했다. 바로 대답하지 말고 시간을 두어 신중히 생각해보라는 브루스의 말은 낯선 남자에 대해 딕이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해가 빨랐던 딕은 자신의 처지를 금방 깨달았고 아직 혼현도 다루지 못 해 다른 사람들이 원숭이로 보이는 자신이 부모 없이 혼자 남아 갈 만한 곳이 고아원밖에 없다는 것, 혹은 자신을 원하는 반류의 집에 팔려가듯 들어가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떠돌이 예인 가족 속에 컸던 딕은 어려서부터 사람 보는 눈이 예리했다. 딕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남자가 그 엄해 보이는 강직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고 싶었다. 이 눈 앞의 남자는 어떤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그래서 딕은 웨인 저택에 입성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상류 사회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어린 서커스 고아를 입양한 사실을 가십거리로 삼았고, 반류 사회에서도 같은 화제를 입에 올렸다. 반류 중에서도 강하고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브루스 웨인의 행보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워낙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껏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 브루스가 파랑새 남자아이를 웨인저에 들였다는 것은 충분히 이슈가 될 만 했다. 몇몇 반류들은 귀하디 귀한 선조귀환 인간을 얻은 브루스의 행운을 부러워 했고, 개중에는 브루스의 마킹을 받는 딕을 질투하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가십이라는 것도 백 일만 붉었다. 브루스 웨인은 선천적으로 타인에게 주목받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타입이 아니었고 이리저리 딕을 내비치며 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양 과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브루스와 그의 고아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 

 

 열 살 때 웨인 저택으로 들어온 데미안 웨인의 경우는 딕 때와 달랐다. 소년은 브루스가 젊은 시절 잠깐 만났던 뱀 중종 탈리아 알굴 간의 관계에서 생긴 아들이었다. 자신을 당신의 아들이라며 소개하는 데미안에 대해 의심하기에 소년은 브루스와 이목구비나 분위기가 닮은 데가 많았다. 데미안은 곧장 웨인저에 받아들여졌지만 브루스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이 웨인저에 금방 익숙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뱀 중종 탈리아와 고양이 중종 브루스 사이에서 태어난 데미안은 브루스와 같은 고양이 중종이었지만 그 성격은 모계에 더욱 가까웠다. 덩치 큰 고양잇과 맹수의 혼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동정심이 없이 오만한 냉혈동물과 같은 성격은 따뜻한 피 동물만이 존재하는 웨인 저택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다. 네코마타 중간종인 고양이 팀은 처음에 서열정리를 한다는 이유로 제 목을 물어뜯었던 데미안을 껄끄러워 하다 못해 싫어했고 늑대 중종인 제이슨도 건방진 꼬맹이에 대해 학을 뗐다. 부친인 브루스 웨인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웨인 저택에 적응하는데 적잖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이 딕이었다. 딕 그레이슨은 본디 그런 녀석이었다. 외로움 타는 녀석이 있으면 먼저 가서 말을 걸어주고 아픈 것을 감추고 있으면 곧장 알아보고 염려해주는. 마냥 착하기만 한 녀석도 아닌데 그랬다. 별 이상한 녀석 다 보겠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딕의 눈치를 흘끗 살피는 자신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레이슨 앞에선 누구나 그랬다. 야무진 팀 드레이크, 불평 많은 제이슨부터 심지어 아버지까지. 누구나 딕의 앞에 서면, 그 푸른 눈동자 속에 자신이 실제보다 더 괜찮은 녀석으로 비치길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한 기분은 알 것 같다. 데미안 자신도 느껴보았으니까.


 누구에게나 베푸는 담백한 다정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그 담백한 온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같은 남자인데도 어딘가 따스한 살결과 깃털 냄새를 풍기는 그 마른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아마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레이슨을.


 하지만 그 깨달음은 늦었고, 좋아하는 감정조차 몇 년은 더뎠다. 자신이 생부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브루스와 딕은 서로를 보고 있었으니 애초부터 시작도 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제 데미안도 웨인 저택에 적응했고 적당히 안정적인 시기니 딕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다며 알프레드와 상담하는 부친의 이야기를 듣게된 이후로 데미안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눈에 띄게 조용해진 데미안의 모습에 팀조차 한 마디 할 정도였다.


 "저 새끼 악마 어디 아픈 것 아냐? 별일이네."


 저녁 식사 직후 곧장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흘끗 쳐다본 팀이 중얼거렸다. 


 "글쎄."


 딕은 어깨를 으쓱이며 매쉬 포테이토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쪽이라면 오히려 자신이다. 특별히 티내진 않지만.


 요즘 들어 딕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둔했다. 팔 다리가 조금 저릿저릿하기도 한 것이, 아무래도 자궁 벌레 때문에 몸이 적응하느라 겪는 변화인 것 같았다.


 동생들에게는 아직 브루스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미리 설레발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선조귀환 케이스기 때문에 보통의 반류보다야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성의 임신 자체가 불안정하긴 했다. 브루스는 신중한 사람이었고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은 시점에 미리 입을 열어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호르몬이 불안정하기 때문일까. 요 며칠째 딕은 석연치 않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의 내용은 대개 비슷하다. 설핏 잠들어 있는 자신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올라탄다. 작은 형태지만 제법 묵직한 무게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걸어온 데미안이 제 위에 올라타고, 바지를 끌어내린다. 그레이슨, 네가 내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어. 내 아이도. 소년은 쉰 목소리로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10살 짜리 어린 동생과 몸을 섞는 꿈이라니. 딕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욕구불만인 걸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상대가 데미안인 것은 심하지 않나. 불편한 심정에 딕은 조금 헛기침을 했다. 그런 딕을 보며 팀이 고개를 갸웃대고 묻는다. 감기야?


 제 방 침대에 누운 데미안은 천장을 올려보며 베개를 끌어안는다. 알프레드가 세탁해 둔 베개에서는 보송보송한 햇살 냄새가 배어 있었다. 후각이 예민한 데미안은 인공적인 향기를 질색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섬유유연제는 전혀 쓰지 않는다.


 한참 동안 데미안은 침대 위를 게으르게 데구르르 구르다 혼자서 비슥이 웃었다. 제 형은 아무 것도 모른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을 의심하기에 그는 데미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딕 그레이슨은 밤마다 자기 전에 마시는 우유에 들어있는 약의 존재에 대해 짐작도 하지 못한다. 반쯤 환각 상태에 빠져 잠들어 있는 방으로 자신이 몰래 스며드는 것도 전부 꿈의 편린 정도로 생각해버리겠지. 


 그레이슨이 웨인의 자식을 낳는다면 말야. 그 상대가 나인 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아냐.


 그렇게 생각하며 고양잇과의 소년은 나이 먹은 뱀처럼 킬킬 웃었다.


 소년의 품성은 분명히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수단 가리지 않는 부분은 분명 그의 핏줄 속에 서늘한 피를 지닌 모계의 특성 또한 일정 부분 서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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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 사장님.. 어마어마하게 늦어버렸지만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mm)

* 리퀘: 브루딕 딥키스

* 사장님이 전에 그리신 축구선수 AU




 환타지스타. 이 이탈리아 단어는 축구 선수, 그 중에서도 극소수의 축복받은 천재를 일컫는 말이다. 단순히 공을 잘 차거나 발이 빠른 것과,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을 긴장시키고 어떤 근사한 플레이가 나오게 될까 생각하게 만드는 일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그 선수에게 공이 간 것만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경기 장악력이란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특권으로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에 한해 주어진 선물이었다.


 딕 그레이슨. 그는 환타지스타라는 별명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유스 시절의 첫 공식 경기부터 관중석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의 눈을 빼앗은 신동이었다. 후반전이 되어서야 교체 선수로 나온 무명의 청소년 선수는 경기가 끝난 순간 그날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첫출전 시합을 본 이들 중 소년에게 장래의 스타플레이어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은 없을 정도였다.


 축구계에서 젊은 신예 선수에게 설레발치며 관심을 퍼붓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라 유난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딕 그레이슨이라는 천재 신예의 등장에 축구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이 주목했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모든 신동이 전부 뛰어난 선수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십대 때 반짝하던 선수도 어느 한순간 언제 특별했냐는 듯이 하루 아침에그 기량을 잃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거나, 우쭐함에 취해 게으름을 부려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젊은 신동에 대한 고담시 축구팬들의 지나친 애정도 딕을 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명 지금까진 일개 이름없는 유스팀의 후보 선수에 불과했는데도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된 딕은 잡지사의 스포츠 전문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하고 훈련중의 사진이 신문에 올라와도 들뜨기는커녕 어깨를 으쓱이고 넘길 뿐 크게 신경을 두지 않았다. 적당히 대범하고 느긋해 보이는 그의 태도는 단순히 무딘 성격이라기보단 날 때부터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는 것이 자연스러운 스타성 또한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천성이었다. 


 날 때부터 빠른 발, 흡사 체조 선수와 같은 균형 감각, 전반부터 후반까지 내내 뛰어도 지치지 않는 스태미너, 수비 셋이 달라붙어도 아랑곳 않고 제치는 돌파력, 팀원들에게 받는 신뢰, 궁지에 몰렸을 때의 침착성, 끈기와 성실성, 넓은 시야,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승리를 향한 이미지네이션. 딕 그레이슨은 스타플레이어가 필요로 하는 모든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고담 FC의 축구 팬들이 '딕만 합류하게 된다면...' 하고 기대를 거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니었단 뜻이다.


 한번 이상 잡지의 표제를 장식한 적도 있는 타이틀인 '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고담 나이츠 유스팀의 젊은 신예'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딕이 수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여러 가지 장점 중엔 길을 걸을 때마다 행인의 눈길을 모으는 수려한 외모도 속해 있었다.


 시원스레 잘생긴 그의 용모는 축구에 별 흥미 없는 소녀팬들조차 한낮에 관중석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게 만들었고, 오랫동안 라이벌이었던 메트로폴리스와의 경기에서 최근 몇 년 간의 부진으로 속을 끓이고 있던 아저씨 팬들에겐 마치 희망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런 딕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축구계만이 아니었다. 고담시의 상류층 인사들도 혜성같이 나타나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축구 신동과 악수를 하는 사진을 찍거나 안면을 트길 바랐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시절부터 딕과 친해지고 인사하고 싶은 유명인사들은 많았기 때문에 유스팀 숙소 캐비넷에는 딕에게 파티에 와달라는 초대장들이 듬뿍 쌓여만 갔다.


 훈련할 시간도 부족하다며 초대장에는 정중히 거절하는 딕이었지만, 그런 딕이라도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초대가 있었다. 그 상대란 바로 고담 나이츠 축구팀의 구단주이자, 세계적인 기업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 그리고 딕 그레이슨의 후견인 브루스 웨인이었다.


 어린 시절 불행한 일로 가족을 잃은 딕을 안타깝게 여긴 웨인 회장은 고아가 된 딕에게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소년의 재능을 간파하고 축구팀을 소개해준 것도 그였다. 개인적으로도 은인인 브루스 웨인의 초대를 그냥 넘길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키지도 않는데 억지로 브루스 웨인의 파티에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브루스 웨인의 초대는 팀이 시즌으로 바쁘지 않을 때만을 골라 이루어졌다.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 여성들이 뽑은 <가장 결혼하고 싶은 독신남성> 앙케이트에서 영화배우를 제치고 5년 연속 1위를 차지했을 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성인 남성이었고 위트있었으며 매너 또한 훌륭했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 때문에 딕이 브루스와 만나는 것을 기껍게 여기는 것만은 아니다. 딕은 브루스의 집사를 제외한 고담시의 어떤 사람보다 자신이 브루스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그의 사교적인 태도 그 너머에 감추어진 깊은 생각과, 사색, 신념, 고요한 열의 같은 것들은 결코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면모지만, 어렸을 적부터 브루스를 알아온 딕에겐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브루스 웨인과 그가 후원하는 화제의 천재 소년 사이의 오래된 교분에 대해서는 고담시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딕을 보며 조만간 A군에 올라 브루스 웨인이 후원하고 있는 고담 FC의 새로운 전력이 되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딕이 선택한 것은 뉴욕에 있는 역사가 짧은 신생축구클럽이었다.


 아직 청소년이었음에도 이미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이 열리게 되었다. 기자들을 앞에 두고 앉은 딕 그레이슨은 익숙한 '고향'에 안주하는 대신 밖으로 나가 넓은 세계를 보고 성장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고담 FC가 아닌 다른 축구 클럽이냐며 따질 순 없는 일이다.


 당시 몇몇 용감한 사람들은 딕 그레이슨의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는 브루스 웨인에게 그레이슨 군의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브루스 웨인은 말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피후견인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말과 함께 능숙하게 대화를 돌릴 뿐이었다.



 "미스터 그레이슨,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5분이면 돼요."


 공항 출구로 나오자마자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카메라에 딕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의 여기자가 서 있었다. 스포츠 분야에 오래 몸담고 있는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여기자의 이름은 비키 베일이었다. 딕에게 마이크를 내민 그녀는 오늘 그에게 쓸 만한 말을 몇 마디 얻어내지 않으면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이 강렬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막 고담 항공에 도착한 딕을 맞이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비키 외에도 그의 주변은 이미 각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의 기자 수십 명이 딕이 탄 항공기의 도착 시간에 맞춰 몇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었다. 시도때도 없이 다가오는 인터뷰나 카메라 세례엔 익숙했진지 오래지만 오늘은 그 수가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평상시의 두 배, 혹은 세 배 정도. 물론 환호하는 팬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 탔던 비행기에 자기 말고 연예인이라도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던 딕은 자신이 나왔던 출구 뒤쪽을 흘끗 돌아보았으나 공항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딕 그레이슨'만'을 목적으로 이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오늘은 타이탄즈에서 3년, 세리에A에서 2년간 지냈던 딕 그레이슨이 고담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담 FC가 딕 그레이슨을 데려오기 위해 이탈리아의 팀에 제시한 이적료의 어마어마한 액수는 이미 한차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 있다.


 "짧게요, 비키. 양해해줘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딕이 미소지었다.


 "비행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저녁 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고마워요 딕. 몇 가지 질문만 빨리 할게요."


 스타 중에는 기자들을 영 달갑지 않아 하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딕 그레이슨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귀찮을 정도로 붙어오는 파파라치에게조차 강경하게 대응한 적이 없다. 아무리 사람 좋은 선수라 하더라도 깐깐한 심판에게 내내 트집을 잡히거나 그날따라 저조한 컨디션으로 경기를 망친 날에는 심술궂은 기자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어떻게 그렇게 형편없는 경기를 펼쳤냐며 질문의 탈을 뒤집어 쓴 비난을 퍼붓는다면 표정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욕설을 내뱉거나 멱살을 잡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적어도 딕에 한해선 그런 일이 일체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과하게 소모된 날에도 그는 항상 몸에 배인 친절을 잊지 않았고 상대의 무례한 언사도 적당히 받아 넘겼다. 딕 그레이슨의 열성팬인 이들은 왕자님처럼 스윗하다며 마냥 좋아했지만, 적어도 냉철한 커리어우먼인 비키는 그러한 딕의 철저한 자기 통제에 혀를 내둘렀다. 꿈꾸는 듯한 푸른 눈동자의 미남에 축구를 그렇게 잘하는 주제에 매너까지 뛰어나다면 사람으로서 좀 과하지 않나?


 공항 벽면에는 딕 그레이슨을 모델로 한 스포츠 웨어의 커다란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그 광고판이 배경으로 보이도록 각도를 맞춘 채 사진기자는 열심히 플래시를 터트려댔다. 같은 방송사의 조수가 사진을 잘 찍고 있는지 흘끗 확인하며 비키는 딕에게 질문을 건넸다.


 "우선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요, 딕. 아직 유스였던 당신이 뉴욕으로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낙심했는지 기억하시죠? 정말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당신은 어릴 때부터 이미 1군의 장래 기대주였으니까. 3년 동안 뉴욕 타이탄즈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해 한 마디 코멘트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우선 무난한 질문으로 대화를 열었다. 거기에 대한 딕의 대답 또한 모범적인 것이었다. 타이탄즈에서의 시간은 자신에게 풍부한 경험을 쌓게 해주었으며 팀원과의 협동에 대해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대답하는 딕의 모습은 운동 선수라기 보다 미리 주어진 질문에 대해 준비한 대답을 내뱉는 배우만큼이나 깔끔하고 유려했다. 하지만 그저 듣기 좋은 말끔한 단어만 주워 삼켰다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듣기 좋은 모범적인 표현만 입에 담는다고 해도 그 말을 하는 이가 딕 그레이슨이라면 누구도 답변에 담긴 진정성을 의심할 리 없다.


 "고담FC에서 그레이슨 선수를 데려오는데 제시한 이적료가 이슈가 되었다는 건 아시죠?"

 "고담 시민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선 열심히 뛰어야겠군요. 개인적으로 고든 감독님과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포부 같은 것을 묻던 비키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단히 사적이면서도, 많은 이들이 흥미롭게 여길 만한 주제였다.


 "오늘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연인인가요?"


 세리에A 시절 자주 입었던 푸른색 유니폼을 따서 '코트 위의 푸른 날개' 같은 다소 간질거리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매력적인 용모의 딕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사귀는 사람은 있지만 연인에 대한 질문은 노코멘트로 일관할게요. 그 사람, 굉장히 수줍음이 많아서 언론에 노출이라도 되었다간 곤란해지거든요."

 "많은 팬들이 아쉬워하겠네요."

 "꽤 오래 사귄 사이에 롱디지만 그래도 뜨겁답니다." 


 딕이 가볍게 윙크를 던지자, 주변에 서있던 여기자들뿐만 아니라, 중년의 아저씨 기자마저 얼굴에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만다. 축구 선수 딕 그레이슨이 고담시에 있어 어떤 존재인지는 그러한 단면만을 봐도 명확했다. 그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었고, 기대주였으며, 다가올 메트로폴리스 FC의 코를 찍어 눌러줄 영웅이었다.





 "와우. 타이틀 좀 봐. 고담시 왕자의 귀환이라. 거창하군."


 읽고 있던 오늘자 신문을 탁 접으며, 팀 드레이크가 감상을 내뱉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식당에서 걸어 나오다 그 말을 들은 딕은 민망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몇 걸음만에 성큼성큼 거실에 들어온 딕이 소파에 앉아 있는 팀의 어깨 너머로 스콘을 내민다. 팀은 딕이 얼굴 옆에 내민 스콘을 그대로 한 입 깨물어 우물거렸고, 다시 손을 회수한 딕은 팀이 베어문 스콘을 입에 홀랑 털어넣었다.


 "건포도 스콘이네."


 신문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팀은 딕이 앉을 수 있게 소파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가볍게 등받이를 뛰어 넘어 팀의 옆에 앉은 딕은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프레드의 음식 솜씨가 그리웠어."

 "여전히 와플은 잘 못 만드셔."


 무심하게 흘리는 팀의 대답에 딕은 와하하 웃어버리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역시 집이 좋다.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어."

 "형이 아직까지도 웨인저택을 집으로 인식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정면의 창문을 응시한 채 팀이 덤덤히 말을 덧붙인다.


 "무려 5년이야. 5년 동안 밖에 있었잖아."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솔직하게 서운했다는 말 대신 어른스럽게 구는 팀의 모습에 딕은 씩 웃으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이 흐트러지는 데도 미간을 찡그리기만 할 뿐 가만히 있는 팀의 모습이 귀여웠던 딕은 급기야 팀을 끌어당겨 반듯한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아오, 딕. 하지 마. 아침 내내 점잖은 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팀이었지만 그 공격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딕의 턱이나 뺨을 손바닥으로 꾹 밀어대는 것이었다.


 집요한 공격에 숨이 차서 킬킬 웃던 팀이 호흡을 고르며 문득 물었다.


 "그런데, 브루스는?"

 "루시우스와 미팅. 오후에 시의원을 만나고 돌아오면 아슬아슬하게 오늘도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대."

 "흐음."


 갑자기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는 팀의 반응에 딕은 의아해했다.


 "왜?"

 "흥미로운 일이지."


 느긋하게 내뱉으며 팀이 피식 웃는다.


 "나는 계속 웨인저에 살았는데도 막상 형이 돌아오자마자 브루스의 스케줄은 형이 꿰고 있게 되었다는 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딕은 입을 다문 채 스콘 부스러기 묻은 손바닥으로 팀의 얼굴을 슥슥 문댔고, 팀은 가볍게 항의하며 달콤한 향이 나는 기름 묻은 손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뒤로 제쳤다.


 "데미안은?"


 자신이 도착했는 데도 얼굴 한 번 내밀지 않는 브루스의 친자에 대해 언급하자, 그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팀은 곧장 얼굴을 냉랭하게 굳혔다. 그 무뚝뚝한 대답만 봐도 팀이 데미안을 썩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확연했다.


 "5박 6일 어린이 훈련캠프."


 브루스 웨인의 친자인 데미안 웨인은 자신도 축구 선수가 되겠다며 벌써부터 딕을 라이벌시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기고만장하게 굴고 있을지 몰라도 너 정도는 얼마든지 제낄 수 있다며 호언장담하던 열 살 짜리의 도발에 대해 이미 이십대 중반의 딕은 크게 의미두고 있지 않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데미안은 진심으로 딕을 따라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에 대해 팀은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제깟 게 딕의 발끝에나 따라올 수 있을 것 같아? 데미안에 대한 팀의 혹독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이 상당히 장래성 있는 소년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브루스 웨인의 혈통인 만큼 어느 정도의 재능은 기본적으로 타고 태어났을 테고, 어린 시절부터의 영재 교육 덕분에 그 운동능력과 냉철한 판단력은 오래전에 또래를 뛰어 넘었다.


 "그래서 안 보였구나."

 "형은 안 만나는 게 좋을 텐데."

 

 딕이 마시던 오렌지 주스컵을 가져와 한 모금 뺏어 먹으며 팀이 묘한 뉘앙스로  말을 흘린다.


 "저번달 일러스트레이티드 인터뷰에서 현재 형이 주목하고 있는 선수는 누구누구 있는지 물어봤잖아."

 "그랬었나."


 인터뷰 요청이 워낙 자주 들어오기 때문에 들었던 질문을 하나하나 기억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기서 자기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형을 만나면 계단에서 밀어버릴 거래."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리며 팀이 말한다.


 "그레이슨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서, 형 사인이 담긴 축구공을 이베이로 낙찰했더라. 뻔한 애새끼."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어?"

 "걔 컴퓨터 비밀번호, 어렵지도 않더라."

 "여전히 사이가 나쁘, 음. 변함 없구나."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한 딕은 데미안과 친밀해지는 일은 십 년이 지나도 없을 거라며 음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동생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며 자신이 고담을 떠나 있던 동안 알프레드도 그간 고생이 참 많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브루스 웨인은 약속했던 대로 저녁 시간까지 돌아오지 못 했다. 브루스를 마음에 들어한 시의원의 부인이 그에게 저녁 만찬까지 함께 하고 돌아가라며 끈질기게 붙잡았기 때문이다. 부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 한 브루스는 결국 저녁 식사까지 그 집에서 머물렀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브루스 웨인이 탄 리무진이 웨인저에 도착했을 때, 저택 방 안의 불은 대부분이 꺼져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알프레드에게 코트를 건넨 브루스는 넥타이를 풀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게 됐어요. 사양하는 데도 한사코 그를 붙드는 시의원의 부인 덕분에 당초 계획보다 네 시간이나 늦게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애들은요?"

 "티모시 도련님은 방에서 학교 숙제를 하고 계시고, 리처드 도련님의 방은 열 시부터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고담 FC와 계약을 맺고 이번 시즌부터 합류하게 된 딕이었지만, 일주일 간은 여독도 풀고 시차 적응도 하라며 자유 시간을 받았다. 이 일주일의 유예가 끝나면 이후에는 혹독한 개인 훈련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텐데 이 귀한 휴가 기간을 의미 없이 날려버렸다는 데에 브루스는 적잖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딕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지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피로가 몸에 남아 있을 것이다. 프로 선수라면 스스로의 몸을 관리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자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인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모처럼 잠들었을 텐데 방으로 찾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깨어진 저녁 약속에 대한 아쉬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브루스는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잠들어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딕이 고담시에 없는 동안에도, 알프레드는 그의 방을 늘 깨끗이 유지했다. 보송보송한 햇빛 냄새가 배어난 자기 방도 버리고 굳이 브루스의 침실로 기어 들어와 침대에 드러 누워 잠들어 있는 딕 그레이슨의 앞에 선 브루스는 고단했는지 깊이 잠든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딕 그레이슨의 열성적인 소녀팬들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원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브루스는 그저 입가에 엷은 미소만을 띨 뿐이었다. 눈꺼풀은 감겨있지만 그 아래 어떠한 색상의 눈동자가 가려져 있는지, 브루스는 눈을 감고도 그 색을 그려볼 수 있었다.


 굳이 브루스의 침실까지 기어 들어와 침대를 차지하고 잠든 무방비한 얼굴을 바라보던 브루스는 시선을 비껴 내렸다. 불룩하게 솟은 이불 아래의 단단하고 늘씬한 체격. 언젠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푸른 잔디 위를 날아다니던 생기 있고 명랑한 소년에 대해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냥 순수하고 밝던 소년은 어느새 아름다운 청년으로 장성해 있었다. 흰 이마와, 반듯한 어깨, 단단하게 쭉 뻗은 긴 다리와 잘 짜인 등. 어린 날 이미 숨길 수 없이 빛나는 재능으로 브루스 웨인의 시선을 빼앗았던 천재 소년은 어느새 세상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유럽과 고담은 시차가 다름에도 피치못할 상황이 아닌 이상 브루스는 딕의 경기를 거의 챙겨보곤 했다. 소년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그 재능이 개화하도록 도와준 생애 첫번째 후원자인 만큼 놀랄 일도 아니었다.


 딕이 고담을 떠나 타이탄즈에 들어가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상담해왔을 때, 브루스는 자신이 발견해 낸 원석이 이제 제 손을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그로서도 비밀스러운 행복이었지만, 떠나려는 소년의 발목을 붙잡기에 브루스는 성숙한 남자였고 딕의 앞날을 위해서는 그러한 선택도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브루스가 단 한 번 말리는 일도 없이 딕의 결정을 존중해주자, 딕은 속 모를 눈빛을 하고 자신의 후원자이자 보호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도 딕이 삼켜버린 말에 대해 그때 물어볼 것을 그랬다고 이후에 종종 생각하곤 했지만 직접 입 밖에 내어 묻지는 않았다. 이후로 딕은 시즌 오프 때나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웨인저로 돌아왔고 그 이후의 시간은 전부 고담시 바깥에서 보냈다. 딕이 웨인 저택에 머무는 시간 동안은 되도록 딕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려고 일정을 조정하긴 했지만, 정작 딕을 만나러 뉴욕이나 이탈리아로 가본 적은 없었다. 딕 또한 브루스나 알프레드에게 한번쯤 경기를 보러 오라고 초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낸 성과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보고를 보내왔다. 웨인 저택에는 딕이 매 시즌 보내준 트로피로 장식된 기념품 방이 있다. 작은 메달이나 기념품마저도 자신이 보관하는 일 없이 매번 웨인저택으로 곧장 부쳐왔기 때문이다. 유스 시절부터 딕의 팬이었다는 팀 드레이크는 그 기념품 방에 들어갈 때마다 개다래 열매를 선물받은 고양이처럼 차분하던 표정이 흐물흐물 풀렸다. 브루스로서는 딕의 성장이, 활약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조금쯤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남자가 침대 옆에 우뚝 선 채로 있을 때, 잠든 줄로만 알았던 청년의 입이 열린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딕이 중얼거렸다.


 "잠든 사람을 깨우는 법은 브루스도 알잖아요."

 "내가 깨운 거니?"

 "아직은 아니에요."


 브루스가 허리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춰줄 때까지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있던 딕은 브루스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목을 끌어안으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지금 몇 시예요?"

 "열한 시 쯤 되었구나."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딕은 브루스가 겉옷을 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을 깨기 위해 눈을 깜박이는 폼이 영 불안해 보였지만, 브루스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딕은 완전히 잠이 깬 얼굴을 하고 탁자 위에 놓인 브루스의 손목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브루스의 손목에 딱 맞게 제작된 시계를 손목에 차자, 잠금쇠를 걸고도 약간 헐렁하게 시계줄이 남았다. 딕은 재미있다는 듯 코를 찡그렸다.


 "나도 꽤 몸을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전보다 조금 마른 것 아니냐?"

 "알아보겠어요? 트레이너 성화에 식단을 바꿨었거든요. 내가 너무 정크푸드만 먹는다나."


 안 그래도 알프레드가 자신을 살찌우려고 음모를 세우고 있는 것 같다며 가볍게 웃어보인 청년은 가운 허리끈을 매고 있는 브루스의 옆에 다가서며 그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남자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야생에서 수컷들은 본능적으로 경쟁하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다. 우두머리 수컷은 보다 젊고 강한 수컷의 존재를 경계하며 자신의 핏줄이 아닌 새끼들은 쫓아내거나 물어 죽인다. 동물로 비유하자면 딕은 분명히 요요하고 우수한 젊은 수컷일 것이다. 하지만 제 영역을 가볍게 비집고 들어오는 딕에 대해 남자는 관용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애정을 띤 눈으로 발소리 내지 않고 걸어와 뺨을 부비며 딕 앞에서 브루스는 본능적인 불편함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딕이 제게 매달려 느릿하게 숨을 내쉬는 일을 용인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기대고 있는 모습은 성숙한 어른의 행동보다는 보호자에게 아양을 떠는 새끼 짐승에 더욱 가까웠다.


 세 달 전 유벤투스전에서 상대팀의 집요한 견제로 결국 부상을 입고 코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걱정하며 달려온 동료들에게 자신은 괜찮다며 사나울 정도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성가시다는 듯이 손등으로 피를 슥슥 훔치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살가운 태도였다. 기예에 가까운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편의 수비수 세 명을 제치던 딕의 모습에 열광했던 팬들이라면 브루스 앞의 느슨한 미소와 자신의 스타를 연결시키기조차 힘들 것이다. 딕은 브루스의 앞에서 어떤 때보다 편안해 보였고, 상대의 앞에서 유독 솔직해지는 것은 브루스 또한 같았다. 


 얇은 가운 위로 드러난 단단한 어깨 근육을 슬쩍슬쩍 건드리던 딕은 브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그 턱에 입술을 문댔다. 막 면도해서 매끈한 턱의 감촉에 딕은 기분 좋게 목울음 소리를 냈다. 브루스가 가만히 있다는 것을 확인한 딕은 브루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성가실 정도로 브루스의 얼굴에 입술을 쪽쪽 대었다. 결코 이런 종류의 인내심이 길지 않은 브루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 딕의 기습은 지속되었다.


 "뭘 하는 거냐? 새로운 버릇이 생겼구나."

 "충전중이에요."

 "무엇에 대한?"

 "아무래도 브루스가 없는 곳에선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구요."

 

 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청년의 말에 브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찔끔해버릴 브루스 웨인의 엄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딕은 오히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남자의 미간에 잡힌 세로 주름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주며, 딕은 한참만에 수면 위로 올라온 동물처럼 깊게 심호흡했다. 브루스에게 살살 달라붙어 도통 떨어지려 들지 않는 모습은 어린 시절 이후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타지 생활이 너무 길었던 탓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다 큰 청년은 지금 자신에게 어리광이라는 것을 부리고 있는 참이다. 다 컸다고 생각하고 있노라면 얼핏 보이는 소년 시절의 잔재에 완강하던 남자의 얼굴도 조금쯤 누그러지고 만다.


 "왕자의 귀환이라더니 더 어려져서 돌아왔군."


 오늘 아침 고담 옵저버 헤드라인을 언급하는 브루스의 말에 딕은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주인님은 리처드 도련님에 관한 기사라면 이탈리아 잡지에 난 내용까지 전부 체크하고 있다고 일전에 알프레드가 넌지시 알려주긴 했지만, 설마 브루스가 그 기사의 표현을 인용할 줄은 몰랐던 딕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하게 웃었다.


 "신문 같은 데서 표현하는 말은 지나치게 낯간지럽다니까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니."

 "글쎄요. 천성적으로 안 맞는 일 같은 것도 있다구요."


 작게 투덜대며 뒤로 물러서는 딕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브루스는 예고도 없이 손을 뻗어 딕의 뒷목을 잡았다. 갑작스레 끌어 당기는 브루스의 손길에 딕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하지만 입술을 강하게 짓누르는 키스에는 여지없이 반응하고 만다. 부드럽다기 보다는 약간은 거친 키스에 호응하며 청년은 브루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무리 웨인저 내에 함께 지낸다고는 해도 한 기업의 회장이라는 것은 결코 한가할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단둘만의 시간을 갖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의 팔이 청년의 허리를 감았다. 애초 피할 생각도 없었지만, 브루스의 커다란 손은 딕의 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 고개를 뒤로 빼는 것조차 어려웠다.


 "브루,스."


 뭔가 말할 듯이 숨을 짧게 끊어 내쉬며 이름을 부르려 들었지만, 남자는 나직하게 으르렁대며 입술로 딕의 입을 틀어 막았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일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딕만이 아니었다. 청년처럼 겉으로 내색하진 않고 있었다 해도 브루스 또한 늠름하게 장성했으나 여전히 제게만은 유순한 양처럼 굴어대는 딕을 품안에 안고 싶어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솔직한 푸른 눈동자가 흐려지며 쾌감에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브루스는 자신답지 않게 허겁지겁 딕의 입술을 탐하며 어느새 침대 위로 딕을 넘어트렸다. 몸 위로 가득 쏠린 브루스의 체중에 잠시 숨을 멈춘 딕은 킬킬 웃으며 브루스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틀어 그의 콧등부터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하아, 이적한지 얼마 됐다고. 벌써부터 새 구단주님께 잘 보이려고 몸으로 로비하는 기분이에요, 브루스."


 가벼운 농담에 미간을 찌푸리며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인 남자는 딕의 귓가를 살짝살짝 깨물어대며 나직하게 울리는 저음으로 속삭였다.


 "그런 목적이라면 정말로 잘해야 할거다. 나는 몸로비에 있어 그 기준이 상당히 까다롭거든."


 브루스에게 농담의 소양은 전혀 없는 모양이라고 딕은 벌써부터 열이 오른 머리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인은 위트로 한 말에 아랫배가 오싹오싹하게 달아오르며 몸이 들썩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쩐지 초조해진 딕은 브루스가 좀 더 편하게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침대 안쪽으로 몸을 빼며 노골적으로 기대감이 담긴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오, 브루스. 시간끌지 말고 그냥 해도 돼요. 안전한 날이니까."


 이런 와중에도 유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장난스럽게 씩 웃어보이는 딕의 미소에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잠시 떨어져있는 사이에 좋지 못 한 버릇이 든 것 같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브루스는 단번에 딕의 몸을 뒤집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 갑자기 엎드린 자세가 된 딕은 허리가 붙들려 엉덩이만 위로 들리는 바람에 잔뜩 들떠버렸다. 브루스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브루스의 취향과 성향에 대해서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딕의 방금전 말은 단순히 장난을 치려고 했다기 보다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유도하기 위한 도발에 가까웠다.


 베개에 머리를 박은 채 손을 더듬더듬 뒤로 뻗어 스스로 바지를 끌어내렸다. 등 뒤에서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게 끊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온몸이 오싹오싹 달아오른다. 여성의 둥글고 보드라운 몸과 달리 거친 훈련으로 보기 보다 흉터가 많고 단단한 몸이지만, 그런 자신의 몸에 브루스가 언제고 침착함을 잃고 만다는 것은 상당한 쾌감으로 다가오곤 한다.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아귀가 허리를 붙들어오는 것에 딕은 벌써부터 앓는 듯 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니까 천천히 해달라거나 하는 부탁은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었다. 양쪽 다 멀리 떨어져 있던 기간이 길었던 탓에 자제할 생각조차 없었다. 조금만 강하게 쥐어도 부서져버리는 연약한 몸이 아니라는 것에 딕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브루스에게 눈길을 보냈다.


 "Bite me."


 대개 구어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아닌, 단어 그대로의 뜻을 담아 속삭이는 말에, 브루스는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청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어떤 종류의 새들은 귀소본능이 유난히 강해서 어디에 풀어놓아도 한번 자신의 둥지로 결정지은 장소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브루스 웨인이 처음 만났던 딕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새에 불과했다. 아직 작고 깃털 냄새가 나던 새는 그 작은 부리와 보드라운 날개깃에도 불구하고 맹금류였고, 무뚝뚝한 남자는 그 새를 아꼈다. 하늘을 활공하는 어떤 새도 따라하지 못 할 만큼 넓은 날개와 날렵한 사냥법을 갖추었음에도 남자의 곁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라고 정한 딕은 멀리 날아간 후에도 반드시 브루스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남자가 달아준 시치미를 뗄 생각조차 하지도 않는 강하고 아름다운 푸른 새매는 남자의 은밀하고 온전한 자랑거리였다.


 올곧게 뻗은 척추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트리던 브루스가 문득 생각난 듯 손을 멈추고 내뱉었다.


 "어제 인터뷰에서 연인이 수줍음이 많다고 했었지. 무슨 의미냐?"

 "아, 이럴 땐 좀 봐줘요."


 잔뜩 달아오른 딕은 남자의 손길이 멈춘 채 이어지지 않자 눈을 흘기며 신음을 삼켰다. 빨리 만져주길 바라는 청년의 기색에 남자는 낮게 웃었다. 사교의 장에서 친교를 목적으로 만들어낸 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는 그에게 있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언제나 브루스의 진짜 얼굴만을 보아왔던 딕의 입장에선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일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브루스는 자신이 길러낸 최상의 예술품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추며 속삭였다.


 "고담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딕."


 그리고 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에야 청년은 비로소 자신이 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정말로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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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데미딕) 요람

연성/完 2015.03.16 01:00

* AA(@FAA804519)님의 숲딕 4컷 만화 보고 떠올라서 썼어요. 소재 사용 허락해주신 제 존잘 AA님 감사합니다>_<

* 데미안 부활

* Red Robin #13-14, Forever Evil #1, Batman and Robin #38 참고







 그날 저녁 만찬의 침묵을 깬 것은, 그리고 더욱 무거운 침묵을 가져온 것은 별 생각 없는 한마디였다.


 “자리가 비었군요.”


 양송이 스프 보울을 스푼으로 휘이 저으며 데미안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다 언뜻 생각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레이슨 녀석. 내가 돌아왔는데도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다니 많이 바쁜 모양이죠?”


 자신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담겨있다고 보이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긴 했지만 세계 최고의 탐정 앞에서 감정을 감출 만큼의 연기력을 갖추기에 소년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눈치 빠른 어른은 언제나 말할 때마다 미간을 좁히는 데미안의 버릇이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과,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침을 삼키고 입을 연 것, 테이블 아래로 손바닥을 내려 바지에 가볍게 땀을 닦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데미안의 손안에 들린 플라스틱 잔은 손에 잡힌 모양대로 안쪽으로 약간 우그러진 채였다. 넘치는 악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데미안이 몇 차례 손에 든 유리잔을 깨트린 이후, 웨인 저택의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당분간 데미안의 손에 닿는 범위에서 각종 유리 제품을 치우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브루스 웨인의 앞에 놓인 로열 코펜하겐 풀레이스와 헤렌드 튜린들의 고급스러운 광택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 하나뿐인 친자의 앞에 놓인 음식은 할인매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싸구려 스테인리스 접시에 담겨 있었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실제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장식용으로나 겨우 둘 비싼 은촛대로 식탁을 환히 밝히는 웨인가의 재력이라면 고급 식기 몇 개 정도 깨진다고 해서 가계에 큰 손해가 가는 것도 아니겠지만 집안을 돌아다니는 큰 개의 존재에 대해 떠올린 데미안은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지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는 알프레드의 말에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납득했다. 당분간은 스테인레스와 플라스틱만을 사용해야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데미안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체스 챔피언에게 체스를 배웠을 때도, 경영학 수업을 듣거나 악기를 처음 접했을 때도 데미안의 학습 속도는 언제나 일반적인 아이들의 속도를 상회했다. 다시 살아나면서 생긴 초인적인 능력에도 금세 적응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빠른 데미안이라고 해도 언제나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외할아버지의 시종들에 둘러싸여 지냈기 때문에 타인의 눈치를 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데는 기민했지만, 다른 이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딘 편인 데미안으로서는 자신이 그레이슨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경직된 아버지의 어깨와, 플레이트를 긴 식탁으로 나르다 멈칫한 집사의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레이슨 녀석,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문을 박차고 고담을 떠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이트윙은 자신을 꽤나 아끼는 편이었으니 데미안의 죽음에 충격을받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배트맨과 언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높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건방지게 배트맨에게 대들면 쓰나. 혀를 쯧쯧 차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라 데미안은 약간이지만 기고만장해졌다. 그래서 데미안은 얼굴에 으스대는 미소가 실리지 않도록 샐러드 보울에 관심 있는 척 했다.


 그런데 식탁 앞의 침묵이 너무 길었다. 딱히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운을 뗐다면 아버지나 충직한 집사 중 누구 하나라도 그레이슨의 근황에 대해 오랫동안 웨인 저택을 ‘비웠던’ 소년에게 설명해줄만 한데도 다들 불편한 주제에 대해 말할 때처럼 대답을 주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집사는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부엌 쪽으로 향했지만 일순 비친 그의 주름진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않을 만큼 강단 있는 그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눈물을 비치다니. 형제의 성생활, 부모의 바람, 친구의 불륜에 관한 화제만큼이나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에 데미안은 적잖이 충격 받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식사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를 닮은 아버지와 아들뿐이었고, 결국 브루스 웨인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데미안의 눈은 크게 뜨였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화면 속에서 웃고 있다. 상당한 미인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독초와 같이 파멸적인 공격성을 띠고 있다. 여자의 손에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청년의 머리칼이 잡혀 있었다.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검은 머리엔 엉겨 붙은 붉은 피가 꾸덕꾸덕 굳어있다. 아는 이의 얼굴이다. 알고 있다. 데미안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름이나 얼굴 정도나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 웃는 방식, 사람을 위로할 때의 태도, 역경에 대처하는 강함마저 알고 있기 때문에 ‘안다’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상을 보는 내내 데미안이 느낀 감정은 아는 사람의 얼굴을 우연히 tv에서 봤을 때 느낄 법 한 친숙함과는 달랐다. 범죄 현장에서 경찰이 보디백을 옮기는 과정에 열려있는 지퍼 사이로 친지의 얼굴을 본 것 같이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얼굴을 한 악인들의 손에 나이트윙은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손이 이미 맞아서 퉁퉁 부어있는 나이트윙의 얼굴에 향한다.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뺨을 훑고 지나간 섬세한 손끝은 얼굴에 밀착되어 붙어있던 도미노 가면을 강제로 뜯어냈다. 나이트윙의 정체가 드러나는 모습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났다.


 헤레틱에 의해 살해당했던 데미안은 자신이 세상에 없던 동안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악인들이 저스티스 리그를 몰아내고 세계를 점령했으며 나이트윙을 죽였다. 원수를 갚을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에 연루된 악당들은 돌아온 저스티스 리그에 의해 이미 붙잡혔다. 따라서 나이트윙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던 데미안은 묘비 앞에 턱을 괴고 우두커니 앉아 차가운 대리석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진 그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굳이 손을 뻗어 돌 표면의 차가움을 느끼려 하진 않는다. 데미안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스한 체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을 방해할 뿐이다.







 “그레이슨에게도 보여주지 그래?”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데미안은 딕이 서있는 방향을 흘끗 보았다. 마침 딕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친 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펴진다. 순간적으로 비친 짜증의 기색에 데미안은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뭔데 그래. 망토를 벗어 걸어놓고 딕이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고 레드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슨 진실? 딕도 앞으로의 행동 계획 정도는 알고 있어.”

 “아, 그러시겠지. 그럼 그 화면의 이면에 뭐가 있는지 그레이슨에게 보여줘.”


 데미안이 내뱉은 순간 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표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분명히 욕설에 가까웠다. 팀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을 때, 최근 예의주시 중이던 슈퍼빌런의 목록은 슈퍼히어로의 명단으로 바뀌었고 그 중엔 데미안 또한 들어있었다. 아... 딕이 나직하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브루스의 부재로 인해 딕과 다이나믹 듀오를 이루어 로빈으로서 활동하고 있던 데미안은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왔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당연할 정도의 기본상식조차 없었고 지금껏 익혀온 태도를 완전히 바꾼 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저지른 작은 실수에도 레드로빈은 니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배트맨은 원래의 두 배로 바빠졌다. 자신은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변화에 대해서 칭찬해주긴 커녕 늘 지적질만 돌아오니 데미안은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어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레드로빈이 자신을 마뜩찮게 여긴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싫어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고,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고작 이거라니. 히트리스트 속의 제 사진. 팀이 만일을 대비해 경계해두고 있는 목록 속에 들어있는 제 모습을 본 순간, 데미안은 기분이 상했고 심지어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상처받아버렸다.


 화가 나서 방안에 틀어박힌 데미안은 하루 종일 팀을 찔러죽이고 태워죽이고 떨어트려 죽이고 독살하고 쏴죽이고 말려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운이 나지 않아서 그저 침대에 드러누워서 천장만을 올려봤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팀 드레이크와 자신의 인연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악연을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코가 시큰해서 콧잔등을 찌푸리며 씨근덕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도 좋다고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편한 사복으로 갈아입은 딕이 발소리 없이 걸어왔다. 앉아도 좋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딕은 천장을 쏘아보고 있는 데미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자신을 위로해주거나 팀을 혼내주었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데 딕은 그저 앉아만 있을 뿐이었고, 침묵을 견디는데 익숙하지 않은 데미안은 자기가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크를 죽일 생각이야.”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잠겨있어서 데미안은 놀랐지만, 계속 해서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자고 있는 동안 살해한다면 비명도 없고 조용하겠지. 피가 좀 튈지 모르겠지만 청소로 페니워스를 고생시킬 만큼의 출혈은 만들지 않을게.”


 그레이슨이 좋아하지 않을 만한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딕은 별다른 표정 없이 데미안을 쳐다볼 뿐이다. 흘끗 딕의 표정을 바라본 데미안은 그림자가 드리운 딕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색의 빛깔은 바다나 하늘, 강물보다는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꿈이나 환상, 혼돈, 매혹, 은닉 같은 개념과 닮아있다. 얼핏 보면 맑은 빛깔이지만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져버린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데미안은 입을 한번 꾹 다문 후에 기세 좋게 딕을 쏘아보았다. 딕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아버지의 졸개. 아버지가 주워주지 않았다면 거리에서 빌어먹고 살았을 하찮은 고아. 사람만 좋은 머저리같은 녀석-.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딕 그레이슨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이전의 자신이 어떻게 한때나마 그를 업신여겼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딕은 만만찮은 사내였다. 배트맨이 없는 저스티스 리그에 시의적절한 조언을 건네고, 고담시의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데미안을 사이드킥으로 발탁해 지금껏 그레이슨이 해온 일들은 단순한 대타 따위가 이뤄낼 수 없는 업적이었고 그는 배트맨에 대한 경의와 존경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대단했다. 그 데미안 웨인이 점점 호감을 품었을 만큼.


 기분이 잔뜩 상한 데미안이 씩씩대며 팀의 암살계획을 주절거리는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딕은 손을 뻗어 데미안을 끌어당겼다. 딕에 대해 경계하고 있지 않던 데미안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끌려가 딕의 품에 상체가 안겼다. 당황한 데미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잘 웃거나 어깨를 두드려주는 일은 잦았지만 같은 남자끼리니만큼 스킨십이 많진 않았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딕의 새 셔츠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푹 잠긴 채 굳어있었다. 지금 딕의 행동이 대개 평범한 가정에서 아이를 달래줄 때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의외로 건조한 구석이 있는 딕이 왜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끌어안아주는지 데미안으로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레이슨?”


 황당함에 자그맣게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 딕은 편안한 어조로 말문을 텄다.


 “달수를 못 채우고 나온 갓난아기들 말이야. 한동안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때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려준대. 그럼 거짓말처럼 편안해져서 잘 잔다는 거야.”


 자신은 그 이야기를 열 살 때 처음 듣고 대단히 감동받았다고, 딕은 말했다. 아무래도 딕은 딴소리로 데미안의 주의를 돌리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 이후에도 별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았으니까. 그런 싸구려 감상을 왜 자신에게 들려주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데미안은 딕을 밀어내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의 왼쪽 얼굴은 딕의 품에 완전히 파묻혀있었다. 섬유의 촉감이 볼을 간지럽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데미안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심장소리라는 것이 어떤 건지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귀신처럼 눈치도 빠른 딕 그레이슨은 데미안이 뭘 하는지 곧장 알아채곤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책에서 본 것처럼 콩닥콩닥- 두근두근- 바깥에 들릴 정도로 요란할 것은 없는 소리지만 밀착한 가슴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이고 미세한 박동에 데미안은 왠지 얼굴이 붉어져버렸다.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봐선 안 될 비밀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끌어안겨진 경험은 있지만, 사실 타인의 심장 소리를 그렇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숨소리도 죽인 채 가만히 안겨있는 데미안을 내려보며 딕이 작게 웃었다.


 “오, 데미안도 기분이 편안해졌어?”

 “멍청한 그레이슨, 나는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인공배양기 속에서 자라났단 말야.”


 데미안이 투덜댔다.








 그런 일도 있었지. 침대 위에 누운 데미안은 침대 바깥으로 손을 뻗어 검은 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밤의 패트롤을 대비해 낮잠을 자둘 시간이지만, 초인이 된 이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이 좋아진 데미안은 굳이 휴식을 취해둘 필요가 없었다.


 요 며칠 데미안은 아버지와 함께 패트롤을 다시 돌았다. 다시 다이나믹 듀오의 귀환이었다. 총알조차 튕겨내게 된 보이원더는 강도들의 총을 우그러트리고 단숨에 전봇대에 묶어놓는다. 스스로의 힘에 고양된 로빈은 자기 멋대로 돌발행동을 하려 드는 일이 더욱 잦아졌지만, 그때마다 배트맨의 제지가 돌아왔다.


 그레이슨은 내 개인행동을 존중해줬다고요. 데미안이 꿍얼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아차 싶긴 했지만, 딕의 죽음을 전해들은 지 얼마 안 된 데미안과 달리 아버지는 몇 달이나 부재에 적응할 시간이 있었을 테니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하루 동안 네 방에서 반성하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궁시렁대면서도 침대에 누워있는 데미안이었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잠이나 자기로 했다. 악몽이나 꾸지 않으면 좋을 텐데. 편안하게 늘어진 데미안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잠이 밀려들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얼핏 잠에 든 데미안은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채 눈을 감았다. 주변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적막 속으로 빠져들기 전, 데미안은 아주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미세한 맥동이었다.


 두근-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데미안은 숨을 삼키며 깨어났다. 


 “그레이슨이... 살아있어?”


 데미안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침대 시트가 터지며 침대 기둥이 바닥으로 내려앉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데미안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얼떨떨한 감정과 의문과 기쁨과 환희가 동시에 발을 구르며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버지는 그레이슨이 죽었다고 했는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데미안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데미안이 침대를 박살내며 낸 커다란 굉음에 놀란 티투스가 귀를 쫑긋 세우고 데미안을 바라봤지만, 데미안은 애완견의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벙쪄 있었다. 방금 전, 얼핏 잠들었던 데미안은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한번 들은 적 있던 규칙적이고 자그마한 수축음이었다. 바로 딕 그레이슨의 심장 소리.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그저 죽었다 살아난 부작용으로 망상증에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슈퍼파워가 생겼다고 해도 자신이 전세계의 소리를 듣고 그 중에서도 단 한 명의 심장 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수퍼맨조차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딕 그레이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자신이 억지로 만들어낸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자신이 딕의 심장소리를 들었다는 걸 확신했다. 이 지구 어딘가에 여전히 딕 그레이슨이 살아 숨쉬고, 걷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데미안의 얼굴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얼떨떨했지만, 데미안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거대한 북소리처럼 울리는 바람에 데미안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나이트윙을 붙잡아간 크라임 신디케이트의 일과 딕의 무덤이 저택 안에 있단 사실을 말했을 뿐 딕의 최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끼던 전 사이드킥의 죽음에 더 이상 떠올리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데미안은 그 침묵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발각된 딕 그레이슨이 죽음을 가장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배트맨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어디에도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데미안은 어떻게든 딕이 살아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데미안의 얼굴엔 어느새 혼란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그레이슨이 죽었을 리가 없지. 그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오늘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캐물을 것이다. 그레이슨이 죽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죠? 정말로 딕이 죽었다면 브루스 웨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더하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데미안에겐 피가 이어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정말로 딕 그레이슨이 죽었다면, 아버지가 느낄 절망감은 결코 지금의 모습에 비할 수 없을 거라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기분이라 영 텁텁하긴 했지만, 데미안은 부친을 깊게 신뢰했기 때문에 만약 아버지가 자신이나 알프레드에게까지 딕 그레이슨의 생존 사실을 비밀로 했더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딕을 만나러 가는 것은 그레이슨의 임무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다. 데미안은 그저 아버지에게 딕이 살아있는지 여부만 알아낼 수 있다면 족했다. 자신이 일순간 희미하게 들었던 심장박동이 단지 환청이 아니고, 어딘가에서 살아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든 눈만 감으면 수많은 목소리와 소음 중에서 단 하나의 심박을 들을 수 있다. 쿵- 쿵- 미세하고 일정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다. 세상은 소란스러웠지만, 그 속에서 단지 그 소리만이 또렷했다. 그래서, 데미안은 양수에 감싸인 아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세상은 일종의 거대한 자궁이었다.


 네 앞에 날아 내려가선 공중에서 네 특기인 3단 회전을 해보이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배트맨.  


 벌써부터 딕의 표정이 기대돼서 데미안은 자면서도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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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딕) 열병

연성/完 2014.07.18 01:53

브루딕 단문



 늦가을, 계절 모르고 피어난 꽃이 다음날 해가 뜰 때면 이미 추위에 시들어버릴 것을 짐작한 것처럼 찰나를 살듯이 사랑했다. 적어도 브루스에 대한 내 마음은 그랬다. 눈을 한 번 감는 동안 브루스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눈 깜박이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여겨서 브루스와 있을 때면 눈이 금방 건조해지곤 했다.


 열 살 소년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으레 어른들이 짓고마는 그런 미소는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았다. 그네들의 연애사와 내 마음은 다른 선상에 있었다. 단순히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는 말로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나는 내가 느낀 이 감정이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라고 느꼈다. 난 브루스가 좋고, 좋고, 좋고, 너무 좋아서 만약에 신에게 소원을 딱 하나 빌 수 있다면 브루스와 나를 빼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느낀 그 마음은 달콤한 한때라기보다 혹독한 천형같아서 열 살의 나는 가끔씩 내 마음이 버겁고 무거워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기도 했다. 누굴 이렇게 좋아해본 적 없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의 경험담이나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얘기는 나한테 조금의 참고도 되지 않았다. 잡은 손이 떨어지기만 해도, 시야에서 없어지기만 해도 속상하고 하염없이 서러워지는 건 의존증의 범위도 앳저녁에 벗어났다. 


 어느 날 고열에 들떠 하루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못 한 내 옆에 앉아 독어로 된 책을 읽던 브루스는 이따금씩 손을 뻗어 내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주곤 했다. 나는 숨죽이고 훌쩍이다 몸이 아픈 걸 핑계삼아 애처럼 칭얼거렸다. 


 브루스가 너무 좋아서 아파요.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에 브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네가 아직 어려서 착각하는 거란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 말이 서러워서 열에 들떠 시야까지 불투명한 주제에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저씨가 딱 내 반만큼만 아팠으면 좋겠어요. 그럼 아저씨도 알텐데. 아무리 튼튼하고 건강한 아저씨라도 하루 아침에 앓아 누워서 누굴 좋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깨달을 텐데. 나는 하루 종일 브루스 생각만 난단 말이에요. 아냐. 아냐. 아니에요. 브루스는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아프지 말아요. 내가 브루스 대신 다 아플게요.


 열에 들떠 헛소리처럼 잔뜩 쉬어터지고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색색대는 숨소리와 함께 말을 쏟아내자, 브루스는 커다란 손을 뻗어 내 입을 막아버렸다. 쉬이 쉬이. 애 어르듯이 달래며 내려보는 브루스의 손을 치우는 대신 나는 도리어 눈을 감아버리곤 양손으로 그 손을 쥐고 브루스의 손바닥에 열에 달뜬 볼을 치댔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딕, 너를 어쩌면 좋을까. 푸념같은 중얼거림 끝엔 짜증보단 느슨하게 풀린 웃음이 섞여있었다. 늘 브루스에게 모든 신경과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브루스에 대해서라면 뭐든 예민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브루스가 나를, 나처럼 필사적이고 조급한 방식은 아니라고 해도 딱 그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걸 그 한숨소리를 들은 순간 알았다.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감자 혀차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놀랄만큼 갑자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바짝 마른 입 안에 군침이 감돌고, 몸도 떨리지 않았고, 팔마디도 더 이상 얼얼하지 않았다.


 저택에 온 지 2년, 나는 한 뼘이나 컸다. 나는 내가 자라나는 만큼 아저씨가 나를 생각하는 시간도 길어졌음 좋겠다고 생각하며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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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파트너야.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우린 최고였어. 내 말에 그레이슨은 화이트 렌즈 너머로도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는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데미안 너 또한 내 최고의 파트너야- 라고 말해주진 않았다.

나는 내심 그도 날 가장 좋아한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레이슨이 조금도 어색함 없이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했다고 해서 실망하진 않았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배트맨의' 로빈이었고, 나는 배트맨이 아닌 '로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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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난 지금까지 제이슨이 눈까지 찌푸려가며 진심으로 즐겁게 웃는 모습을 딱 세 번 봤는데 그 중 한 번이 어쩌다 내가 지붕에서 미끄러지는 모습을 봤을 때고, 한 번은 시리얼을 먹다 졸아 그릇을 엎질렀을 때, 다른 한 번이 바로 오늘, 찻잔에 손을 데었을 때다.

물론 저랑 내 사이에 의견차이가 좀 있다 해도 명색이 형제인데 꼭 소리까지 내어가며 웃어야하는지, 참 심술맞은 녀석이라고 바바라에게 우는 소리를 좀 했다. 그러자 그녀는,

"걔가 너 때문에만 웃는다고 꼭 자랑을 해야 해?" -랬다. 나는 머쓱해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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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그의 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긴 손가락이 집어 들던 연한 형광 연두색의 작은 별이었다. 데미안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날이었다. 버석거리는 나뭇잎이 발치에 뒹굴던 그런 가을날, 그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데미안의 방에 들어왔다. 노크 좀 하지. 벽에 기대어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던 데미안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짤막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웃음을 흘리며 데미안의 앞에 걸어와 손을 들이민다. 아무리 봐도 절대 얌전히 물러나진 않을 것 같은 철없는 어른의 접근에 소년은 결국 책을 내려놓고 눈길을 주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양손 가득 담겨있는 별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별이라곤 해도 진짜 별똥별의 조각은 아니었다. 흐릿한 연두색의 별들은 끝이 뭉툭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어린 꼬마들 방 천장에 붙어 있음직한 야광별이었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찬 별 무더기를 본 데미안은 그에게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내며 혀를 찼다.

 

 “그레이슨, 나 책 읽고 있어.”

 

 방해 좀 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하며 데미안이 다시 책을 들자, 야광별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는 데미안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밀어 넣더니 옆구리를 잡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으켰다. 그레이슨 너 미쳤어? 소년은 그런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리그 오브 어쌔신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소년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길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의 친애의 접촉은 낯설기만 했다. 하물며 주요 장기가 모여 있는 몸통에 대한 접촉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상대가 그라는 자각이 없었다면 오랜 기간 몸에 밴 습관대로 반사적으로 베개 안에 숨겨둔 쿠쿠리를 꺼내 경동맥부터 그어놓고 봤을 것이다. 따뜻한 손의 온기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신의 몸을 잡고 있다는 감각에 긴장한 데미안은 경직되어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 안에서 뻣뻣하게 굳은 촉감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끌어안고 달래듯이 이마에 쪽 쪽 소리 내어 가볍게 키스했다. 간지러운 감촉에 데미안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경계어린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그는 또 그런 데미안이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아이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싫을 정도로 느껴지는 체격차에 데미안은 작게 툴툴거렸다.

 

 “그래서 왜 온 건데?”

 

 내 시간 방해하려고? 저 우스꽝스러운 것들은 뭐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쫑알대는 데미안의 질문에 그는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별을 하나 집어 들고 데미안의 얼굴 앞에 이리저리 움직여보였다.

 

 “이게 뭐게?”

 “뭐하자는 수작이야.”

 

 귀엽지 않은 말투에도 그는 자신보다 열 살 터울도 넘는 어린 동생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즐겁게 대답한다.

 

 “별이야.”

 “보면 알아. 그걸로 뭘 하려고.”

 “천장에 붙이자.”

 

 보는 사람이 아연해질 정도의 상큼한 미소에 데미안은 잠시 할 말을 잊고 가만히 그를 올려보다 중얼거렸다.

 

 “알프레드가 화낼걸.”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데미안의 방에 한가득 별을 붙였다. 처음 시작이야 데미안이 그의 억지에 넘어간 모양새였지만 일단 벽에 야광별을 붙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아이 쪽이 더 신나서 정신이 없었다. 데미안은 먼저 심각한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그리곤 열띤 얼굴로 여기저기 지휘봉을 쥐고 지시했다. 그레이슨, 저기! 저기다 그 3cm짜리 붙여. 바보, 그렇게 하면 도마뱀자리가 아니잖아. 어휴 답답해. 이리 내! 소년은 결국 답답했는지 남자의 손에서 별을 왕창 뺏어다가 자신이 나서서 제 방을 가을 밤하늘로 만들고 있었다. 페가수스,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 백조, 도마뱀, 삼각형자리 등등. 소년은 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까지 골라가며 은근히 본격적인 별자리들을 만들어갔다. 기껏해야 천장에 별 몇 개 붙이는 상황만 상상했던 남자는 미소를 띠며 어린 동생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종국엔 밤하늘의 별들을 다 만들기도 전에 그가 가져온 별이 동나버렸다. 데미안은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고작 50개밖에 안 가져와서는.

 

 아직 낮이었기 때문에 커텐을 쳐도 야광별이 빛나는 것을 보긴 힘들었다. 대신 그는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저녁에 패트롤 돌고 와서 같이 보자.”

 

 바보, 여긴 내 방이야. 구경하고 싶으면 내 허락부터 맡아. 데미안의 말에 그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톡 톡. 최상 속의 어린 소년이 아니라 이제 성장한 소년- 아니 소년이라기엔 청년에 가까운 용모의 데미안은 소파에 드러누워 작은 위치추적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금물에 빠져 고장난 위치추적기는 아무리 손을 댄들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데미안은 무료함 속에서 뭔가 만지작거릴 것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데미안은 6년 사이에 부쩍 커졌다. 열네 살엔 매일 팔꿈치와 무릎이 아파서 잠도 깊게 잘 수 없었다. 성장통이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눈에 띄게 변화가 보였다. 목소리가 허스키해지기도 했고, 어깨도 넓어졌다. 멀리서 데미안을 본 사람이 언뜻 데미안의 부친으로 착각하고 부르는 일도 한두 번 있었다. 소년은 빨리 크는 편이었다. 아직 완연한 성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데미안은 벌써 팀의 키를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엔 소년의 정신이 몇 발짝 더 빨리 어른스러워졌다. 데미안은 더 이상 팀 드레이크를 상대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6년간의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공존에 대해 배우게 해주었고, 그들은 여느 평범한 집안의 사이 나쁜 형제들처럼 적당히 데면데면하고 적당히 서로를 무시하며 적당히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에 대해 그는 퍽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너희가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텐데. 온 가족이 함께 모인 거실에서 팀은 못 들은 척 했고, 데미안은 시끄럽다며 퉁명스레 딕의 말을 일축하곤 했다.

 

 지금도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키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고양이같이 살금거리는 발소리가 제 앞에 다가와 어깨를 흔들어 깨울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데미안은 결국 영영 고쳐질 리 없는 작은 기계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데미안뿐이었다. 오늘은 다들 외출했다. 그건 그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평범한 연애라면 늘상 해오던 그가 최근 요리 잡지에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해가며 가족들을 부른 이유는 그 상대가 여느 때와 달리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여자를 데려와 결혼할 상대라고 소개하겠지. 데미안은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딕이 잡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지금 거실에 누워 혼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만 봐도 바쁘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딕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회사 일 때문이라고 하는 데야 별 수 없었다. 데미안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걸 옆에 있던 팀이 힐끗 바라보았다. 데미안이 말을 지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팀은 의외로 별 말 하지 않고 딕을 축하해주었다.

 

 데미안은 푹신한 쇼파에 머리를 댄 채 천장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아직도 제 방 천장엔 야광별이 붙어있다. 지금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온 집안이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기둥에 대고 데미안의 자라는 속도를 기록해준 것도 그였고, 장식장 안에 작은 오르골을 넣어둔 것도 그였고, 거실 벽난로 위엔 그를 포함해 온 가족을 그린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의 체향이 가득 밴 털실꾸러미 속에 온 몸이 잠겨버린 기분이다.

 

 언제나 가을철 별자리만을 보여주는 제 방은 별을 붙인 그 시점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못박아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시간은 결국 어린 때의 추억들에 머물러 있었다. 제 유치하고 어리숙한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색색의 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아름다운 햇살처럼 그는 데미안에게 언제나 찬란하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이런 표현 같은 거 유치해서 생각하는 일조차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하늘을 가볍게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수조 속을 유영하는 희귀한 열대어처럼 반짝거렸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좋아해왔는지는 대답할 수 있다. 그가 제 손목을 잡을 때 아이는 가슴이 뛰었고 자기가 왜 두근거리는지조차 알 수 없어 괜히 심통을 부렸더랬다. 그가 칭찬해주는 게 좋았다. 아버지의 칭찬을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칭찬에 헤픈 남자였지만, 그의 다정한 말은 언제나 소년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데미안은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릴 땐 커다랗게만 느껴진 쇼파였지만 지금은 데미안이 누우면 발목까지 바깥으로 쑤욱 나와 버렸다. 자신은 성장했지만, 제 맘은 언제나 제자리에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바보 같은 그레이슨. 언제까지나 제 다정한 형으로 옆에 있어줄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애초에 손 안에 움켜쥘 수 있는 대상조차 아니었다. 딕은 한 번도 자신을 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거기에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의 것이 될 딕을 생각하고 이렇게 가슴이 지끈거리는 것을 보면 자기기만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데미안은 열 살 때 이후로 처음으로 코를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그레이슨.”

 

 이런 식으로 우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제 안의 나약함을 오롯이 드러내며 어깨를 떠는 데미안의 손에 커다란 개가 머리를 대고 비빈다. 타이투스, 착한 녀석. 그레이트 데인은 제 젊은 주인을 위로하듯 아무 말 없이 그저 체온을 빌려주었다.

그때, 거실 안에서 타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데미안의 어깨가 굳었다. 타이투스가 귀를 쫑긋 대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낯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상대가 나빴다.

 조금 피로한 표정으로 팀 드레이크가 거실을 지나치며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빠르게 걷던 팀은 쇼파에 드러누워 있는 데미안을 발견하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데미안은 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충혈된 눈가를 금방 가렸는지는 그리 확신할 수 없었다. 얄미운 녀석.

팀은 데미안을 놀리는 대신 핀잔을 주었다.

 

 “네가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정말로 무역 건에 문제가 생겼잖아. 식사도 다 못했어.”

 “거기 있다 중간에 온 거야?”

 

 데미안이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묻자, 팀은 넥타이를 다시 채우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엔. 데미안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쇼파 등받이 부분에 턱을 얹고 팀의 뒷모습을 향해 충동적으로 물었다.

 

 “걔 예뻐?”

 

 밑도 끝도 없는 남자애다운 질문에 팀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곤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그렇게 예쁘진 않더라. 근데도 딕은 껌뻑 죽었지만.”

 “, 그레이슨은 원래 눈이 낮아."

 "그런가"

 

 데미안은 조금 심통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팀이 어느새 앉아있는 데미안의 뒤에 섰다. 허리를 굽힌 팀은 데미안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쓸며 일상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도 별로 취향 좋은 것 같진 않지만.”

 

 제 머리를 쓰다듬다 뒷목을 느릿하게 스치고 지나간 손가락에 데미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잠깐의 접촉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은밀함에 대해선 그 손길이 닿은 장본인이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예상치도 못한 상황 때문에 반응이 한 박자, 아니 몇 박자는 족히 늦어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팀의 이름을 불렀을 땐, 팀은 이미 저택을 나가 회사로 향하고 없었다. 팀의 검지가 쓸고 지난 목덜미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멍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저 녀석……,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한 거야? 단조로운 일상이, 평범한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작은 계기로 충분하다는 것을 데미안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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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딕) sweets

연성/完 2013.12.01 20:52
*딕른 교류회 판토 리퀘로 쓴 데코플
*DC comics 숲딕
*연반설정
 
 
 


 갸름한 턱에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동그란 볼, 커다란 푸른 눈동자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숲스."
 
 아이의 눈은 생기있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명랑한 아이는 그 동그란 머리 속에 늘 이런저런 수십 가지 기발한 생각들을 보물상자처럼 감춰두고 있곤 했다.
 자그마한 입술이 달싹이며 다음 말을 이어 내뱉는 모습, 남자는 그 모습에서 작은 경이로움까지 느끼며 아이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한다. 아니 사실, 그는 지금만이 아니라 언제나 아이의 숨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뭐든 말해보렴. 네 부탁이라면 뭔들 못 들어줄까. 네 작은 고사리 손 가득 우주에서 갓 따온 반짝이는 별조각을 쥐어다주랴, 이곳저곳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네가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네 발 밑에 지금껏 인류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드높은 절벽의 만년설을 가져다 융단처럼 포근하게 깔아주랴, 네 두 눈과 똑같이 닮은 보석을 찾아 네 귀에 걸어주랴. 남자는 아이의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기분 좋게 즐기며 말없이 미소지어 보였다.
 
 "케이크 만드는 거... 도와주지 않으실래요?"
 
 하지만 이어 나온 부탁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남자의 예상 범위를 한참이고 벗어났다.
 
 다음날이 브루스 웨인의 생일이라고 아이는 말했다. 딕은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되묻자, 아이는 동그란 눈을 즐거움으로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알피는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스럽고, 데미안은 세상에서 제일 세요! 팀은 제일로 잘생겼고, 또, 제이슨은 어어엄청 용감해요. 남자는 즐겁게 자기 가족 자랑을 늘어놓는 아이의 모습을 웃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딕의 뺨이 또 새빨개졌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금세 시선을 내리깔았다. 뺨 위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다.  
 
 딕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나빠요. 제일 나빴어요."
 
 지금까지 딕에게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고, 손 한 번 든 적 없는 남자로서는 황당한 말이었다. 여태 그는 웨인 저택에 찾아갈 때마다 브루스의 차가운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커다란 손 가득 과자와 젤리 따위를 잔뜩 챙겨갔으며 셋째 제이슨과 싸우다 분해서 씩씩대고 있을 땐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준 적도 잦았다. 슈퍼컴퓨터에 맞먹는 기억력으로 자신의 과거 행적을 전부 되짚어봐도 아이에게 원망받을 일은 단 하나도 한 적이 없는데 나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호인인 클락이라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딕,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니?"
 
 클락은 보통 사람보다 너그럽다거나, 업무 능력이 뛰어나단 평가는 종종 들었으나 눈치 빠르고 세심하단 평가는 들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로선 딕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아이를 타박하기보다는 자신이 미처 배려하지 못한 부분에서 뭔가 미움받을 짓을 했거니 생각이 들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곤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딕의 손은 클락의 팔을 꼭 부여잡은 채다.
 클락에겐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단호한 대답에 클락은 조금 서운해졌지만 천성이 따스한 사람답게 이번 케이크 만드는 작업을 도우면서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해야겠다는 낙천적인 발상 쪽으로 금세 발상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생크림을 묻힌 아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에 닿아오는 모습을 클락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만 먹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대륙을 횡단해 다녀올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어린애의 동작 정도는 늘어진 비디오마냥 느릿하게 보였지만, 남자는 고개를 틀어 손가락을 피하는 대신 제 볼에 보드라운 촉감이 닿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는 클락의 볼에 생크림을 묻히고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얼굴에 생크림 묻었대요! 자기가 생크림을 묻혀놓고 깔깔대는 짓궂은 모습에 클락은 딕의 허리를 단숨에 안아들고 다른 손에 생크림을 찍었다.
 
 요망한 장난꾸러기의 얼굴에도 생크림을 묻혀주려고 하던 클락은 멈칫했다. 딕은 숨도 멈추고 클락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바짝 굳어 남자의 팔에 들려 있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에 당황한 클락은 어른답지 못하게 반격하려고 했던 것이 민망해져 생크림이 묻은 왼손을 등뒤로 감추며 딕을 내려주었다. 
 
 바닥에 다시 내려선 딕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몸을 돌리곤 아무 말도 없이 빵 위에 크림을 얹었다.
 
 클락은 머쓱해져 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에 있는 작은 의자에 커다란 덩치의 몸을 적당히 구겨 앉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선 딕의 숨소리는 여전히 천식에 걸린 사람처럼 새근거렸고 이쯤에서 클락은 딕의 호흡기, 혹은 자그마한 심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해도 딕의 심박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랐고 체온도 미열이 있는 것처럼 높았다. 브루스는 딕의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저 작은 체구로 방어엔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얄팍한 코스튬을 입고 밤 거리에 나서는 것이 걱정되는데.
 
 지금까지 배트맨의 곁을 따르던 역대 사이드킥들과 달리 딕은 '로빈'이라는 자신만의 히어로명을 고집했다. 몸을 보호하는 단단한 특수섬유 재질의 코스튬 대신, 최대한으로 몸을 가볍게 만드는 디자인을 원했고 그 단호한 브루스를 끈질기게 설득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까지 했으니 보통 꼬맹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클락은 약간의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딕의 허리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얇은 다리로, 저렇게 작은 발로 어떻게 총알 앞에 몸을 내던지며 범죄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거지. 브루스가 처음 자신의 아들 데미안을 사이드킥으로 삼았을 때도 클락은 아이가 자경단 일을 하다 다치지나 않을까 우려했지만 리그오브어쌔신에서 훈련을 받고 자란 데미안은 수퍼맨의 조언을 콧방귀뀌며 무시했을 뿐더러 자신은 강하다 호언장담하는 말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클락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것도 노파심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댁 신변이나 조심하시죠, 외계인. 언젠가 어린 데미안이 이죽이던 말을 떠올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등 뒤로 예민하게 클락의 시선을 느끼고 있던 딕이 뾰족한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클락, 벌써 지친 거예요? 아직 딸기 장식은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만 쉬고 있고."
 
 아이의 불평에 클락은 이크 하며 벌떡 일어나 커다란 손으로 깨끗하게 씻어둔 딸기 그릇을 쥐었다. 돈을 아낄 필요 없는 웨인가인만큼 딸기는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클락이 황급히 케이크 위에 딸기를 올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클락을 불렀다.
 
 "아저씨, 잠시만요."
 "응?"
 
 허리를 숙이고 케이크를 장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클락이 고개를 돌렸을 때, 딕은 까치발로 있는 대로 발돋움하며 클락의 목에 매달려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짝 와닿은 입술이 열리며 자그마한 혀가 남자의 볼에 묻어있던 생크림을 훔치고 달아난다. 클락은 갑작스런 키스에 손을 멈추었다.
 
 클락의 뺨을 할짝이자마자 떨어진 딕은 시선을 떨군 채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꿍얼댔다.
 
 "그, 그냥 장난쳐본 거예요."
 
 변명하긴 했지만 도저히 부끄러움을 누를 수 없던 아이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쏙 뛰쳐나가버렸다. 십분이 지나도, 삼십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모습에 클락은 그제야 딕이 도망쳐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린애들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다곤 하지만, 유독 딕에 한해서 클락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장난꾸러기인가 싶으면, 어느 한 순간 눈이 아플만큼 예뻐보이고, 뻔뻔한가 싶으면 또 금방 소녀처럼 수줍어 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짤랑대는 고양이 목걸이 방울같은 모습에 클락은 아이에게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던 볼이 간질거렸다. 클락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싸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식당에 들어왔다가 멍하니 서있는 클락의 모습을 발견한 팀은 식탁 위를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남의 집에 온 덩치 큰 손님 혼자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이 광경이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추리해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태연히 중얼거렸다. 딕에게 예쁨받으시는 것까진 아무래도 좋지만, 그쪽에서 애를 예뻐해주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팀의 말에 남자의 커다란 등이 굳었다.
 
 "하하, 신고할 거예요, 수퍼맨."
 
 흰 셔츠의 청년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을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클락을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인 팀은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고, 자리에 홀로 남은 클락은 침음성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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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연반딕) Skyfall

2013.12.0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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