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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딕) 요람

연성/完 2015.03.16 01:00

* AA(@FAA804519)님의 숲딕 4컷 만화 보고 떠올라서 썼어요. 소재 사용 허락해주신 제 존잘 AA님 감사합니다>_<

* 데미안 부활

* Red Robin #13-14, Forever Evil #1, Batman and Robin #38 참고







 그날 저녁 만찬의 침묵을 깬 것은, 그리고 더욱 무거운 침묵을 가져온 것은 별 생각 없는 한마디였다.


 “자리가 비었군요.”


 양송이 스프 보울을 스푼으로 휘이 저으며 데미안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다 언뜻 생각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레이슨 녀석. 내가 돌아왔는데도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다니 많이 바쁜 모양이죠?”


 자신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담겨있다고 보이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긴 했지만 세계 최고의 탐정 앞에서 감정을 감출 만큼의 연기력을 갖추기에 소년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눈치 빠른 어른은 언제나 말할 때마다 미간을 좁히는 데미안의 버릇이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과,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침을 삼키고 입을 연 것, 테이블 아래로 손바닥을 내려 바지에 가볍게 땀을 닦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데미안의 손안에 들린 플라스틱 잔은 손에 잡힌 모양대로 안쪽으로 약간 우그러진 채였다. 넘치는 악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데미안이 몇 차례 손에 든 유리잔을 깨트린 이후, 웨인 저택의 집사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당분간 데미안의 손에 닿는 범위에서 각종 유리 제품을 치우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브루스 웨인의 앞에 놓인 로열 코펜하겐 풀레이스와 헤렌드 튜린들의 고급스러운 광택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 하나뿐인 친자의 앞에 놓인 음식은 할인매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싸구려 스테인리스 접시에 담겨 있었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실제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장식용으로나 겨우 둘 비싼 은촛대로 식탁을 환히 밝히는 웨인가의 재력이라면 고급 식기 몇 개 정도 깨진다고 해서 가계에 큰 손해가 가는 것도 아니겠지만 집안을 돌아다니는 큰 개의 존재에 대해 떠올린 데미안은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지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는 알프레드의 말에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납득했다. 당분간은 스테인레스와 플라스틱만을 사용해야겠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데미안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체스 챔피언에게 체스를 배웠을 때도, 경영학 수업을 듣거나 악기를 처음 접했을 때도 데미안의 학습 속도는 언제나 일반적인 아이들의 속도를 상회했다. 다시 살아나면서 생긴 초인적인 능력에도 금세 적응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빠른 데미안이라고 해도 언제나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외할아버지의 시종들에 둘러싸여 지냈기 때문에 타인의 눈치를 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데는 기민했지만, 다른 이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딘 편인 데미안으로서는 자신이 그레이슨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경직된 아버지의 어깨와, 플레이트를 긴 식탁으로 나르다 멈칫한 집사의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레이슨 녀석,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문을 박차고 고담을 떠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이트윙은 자신을 꽤나 아끼는 편이었으니 데미안의 죽음에 충격을받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배트맨과 언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높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건방지게 배트맨에게 대들면 쓰나. 혀를 쯧쯧 차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라 데미안은 약간이지만 기고만장해졌다. 그래서 데미안은 얼굴에 으스대는 미소가 실리지 않도록 샐러드 보울에 관심 있는 척 했다.


 그런데 식탁 앞의 침묵이 너무 길었다. 딱히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운을 뗐다면 아버지나 충직한 집사 중 누구 하나라도 그레이슨의 근황에 대해 오랫동안 웨인 저택을 ‘비웠던’ 소년에게 설명해줄만 한데도 다들 불편한 주제에 대해 말할 때처럼 대답을 주저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집사는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부엌 쪽으로 향했지만 일순 비친 그의 주름진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않을 만큼 강단 있는 그 알프레드 페니워스가 눈물을 비치다니. 형제의 성생활, 부모의 바람, 친구의 불륜에 관한 화제만큼이나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에 데미안은 적잖이 충격 받았다.


 알프레드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식사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를 닮은 아버지와 아들뿐이었고, 결국 브루스 웨인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데미안의 눈은 크게 뜨였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화면 속에서 웃고 있다. 상당한 미인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독초와 같이 파멸적인 공격성을 띠고 있다. 여자의 손에는 피투성이의 얼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청년의 머리칼이 잡혀 있었다.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검은 머리엔 엉겨 붙은 붉은 피가 꾸덕꾸덕 굳어있다. 아는 이의 얼굴이다. 알고 있다. 데미안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이름이나 얼굴 정도나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 웃는 방식, 사람을 위로할 때의 태도, 역경에 대처하는 강함마저 알고 있기 때문에 ‘안다’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상을 보는 내내 데미안이 느낀 감정은 아는 사람의 얼굴을 우연히 tv에서 봤을 때 느낄 법 한 친숙함과는 달랐다. 범죄 현장에서 경찰이 보디백을 옮기는 과정에 열려있는 지퍼 사이로 친지의 얼굴을 본 것 같이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얼굴을 한 악인들의 손에 나이트윙은 붙잡혀 있었다. 여자의 손이 이미 맞아서 퉁퉁 부어있는 나이트윙의 얼굴에 향한다.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뺨을 훑고 지나간 섬세한 손끝은 얼굴에 밀착되어 붙어있던 도미노 가면을 강제로 뜯어냈다. 나이트윙의 정체가 드러나는 모습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윽고 영상이 끝났다.


 헤레틱에 의해 살해당했던 데미안은 자신이 세상에 없던 동안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악인들이 저스티스 리그를 몰아내고 세계를 점령했으며 나이트윙을 죽였다. 원수를 갚을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일에 연루된 악당들은 돌아온 저스티스 리그에 의해 이미 붙잡혔다. 따라서 나이트윙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던 데미안은 묘비 앞에 턱을 괴고 우두커니 앉아 차가운 대리석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진 그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굳이 손을 뻗어 돌 표면의 차가움을 느끼려 하진 않는다. 데미안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스한 체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억을 방해할 뿐이다.







 “그레이슨에게도 보여주지 그래?”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데미안은 딕이 서있는 방향을 흘끗 보았다. 마침 딕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친 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펴진다. 순간적으로 비친 짜증의 기색에 데미안은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뭔데 그래. 망토를 벗어 걸어놓고 딕이 컴퓨터 앞으로 다가왔고 레드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슨 진실? 딕도 앞으로의 행동 계획 정도는 알고 있어.”

 “아, 그러시겠지. 그럼 그 화면의 이면에 뭐가 있는지 그레이슨에게 보여줘.”


 데미안이 내뱉은 순간 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표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분명히 욕설에 가까웠다. 팀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을 때, 최근 예의주시 중이던 슈퍼빌런의 목록은 슈퍼히어로의 명단으로 바뀌었고 그 중엔 데미안 또한 들어있었다. 아... 딕이 나직하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브루스의 부재로 인해 딕과 다이나믹 듀오를 이루어 로빈으로서 활동하고 있던 데미안은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왔던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당연할 정도의 기본상식조차 없었고 지금껏 익혀온 태도를 완전히 바꾼 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저지른 작은 실수에도 레드로빈은 니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배트맨은 원래의 두 배로 바빠졌다. 자신은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변화에 대해서 칭찬해주긴 커녕 늘 지적질만 돌아오니 데미안은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어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레드로빈이 자신을 마뜩찮게 여긴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싫어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고,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고작 이거라니. 히트리스트 속의 제 사진. 팀이 만일을 대비해 경계해두고 있는 목록 속에 들어있는 제 모습을 본 순간, 데미안은 기분이 상했고 심지어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상처받아버렸다.


 화가 나서 방안에 틀어박힌 데미안은 하루 종일 팀을 찔러죽이고 태워죽이고 떨어트려 죽이고 독살하고 쏴죽이고 말려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운이 나지 않아서 그저 침대에 드러누워서 천장만을 올려봤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팀 드레이크와 자신의 인연이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악연을 만들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안다고 해서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코가 시큰해서 콧잔등을 찌푸리며 씨근덕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도 좋다고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편한 사복으로 갈아입은 딕이 발소리 없이 걸어왔다. 앉아도 좋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딕은 천장을 쏘아보고 있는 데미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자신을 위로해주거나 팀을 혼내주었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데 딕은 그저 앉아만 있을 뿐이었고, 침묵을 견디는데 익숙하지 않은 데미안은 자기가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크를 죽일 생각이야.”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잠겨있어서 데미안은 놀랐지만, 계속 해서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자고 있는 동안 살해한다면 비명도 없고 조용하겠지. 피가 좀 튈지 모르겠지만 청소로 페니워스를 고생시킬 만큼의 출혈은 만들지 않을게.”


 그레이슨이 좋아하지 않을 만한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딕은 별다른 표정 없이 데미안을 쳐다볼 뿐이다. 흘끗 딕의 표정을 바라본 데미안은 그림자가 드리운 딕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색의 빛깔은 바다나 하늘, 강물보다는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꿈이나 환상, 혼돈, 매혹, 은닉 같은 개념과 닮아있다. 얼핏 보면 맑은 빛깔이지만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묘해져버린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데미안은 입을 한번 꾹 다문 후에 기세 좋게 딕을 쏘아보았다. 딕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아버지의 졸개. 아버지가 주워주지 않았다면 거리에서 빌어먹고 살았을 하찮은 고아. 사람만 좋은 머저리같은 녀석-.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딕 그레이슨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이전의 자신이 어떻게 한때나마 그를 업신여겼는가 의문이 들 정도로 딕은 만만찮은 사내였다. 배트맨이 없는 저스티스 리그에 시의적절한 조언을 건네고, 고담시의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데미안을 사이드킥으로 발탁해 지금껏 그레이슨이 해온 일들은 단순한 대타 따위가 이뤄낼 수 없는 업적이었고 그는 배트맨에 대한 경의와 존경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대단했다. 그 데미안 웨인이 점점 호감을 품었을 만큼.


 기분이 잔뜩 상한 데미안이 씩씩대며 팀의 암살계획을 주절거리는 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딕은 손을 뻗어 데미안을 끌어당겼다. 딕에 대해 경계하고 있지 않던 데미안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끌려가 딕의 품에 상체가 안겼다. 당황한 데미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잘 웃거나 어깨를 두드려주는 일은 잦았지만 같은 남자끼리니만큼 스킨십이 많진 않았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딕의 새 셔츠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푹 잠긴 채 굳어있었다. 지금 딕의 행동이 대개 평범한 가정에서 아이를 달래줄 때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의외로 건조한 구석이 있는 딕이 왜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끌어안아주는지 데미안으로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레이슨?”


 황당함에 자그맣게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 딕은 편안한 어조로 말문을 텄다.


 “달수를 못 채우고 나온 갓난아기들 말이야. 한동안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때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려준대. 그럼 거짓말처럼 편안해져서 잘 잔다는 거야.”


 자신은 그 이야기를 열 살 때 처음 듣고 대단히 감동받았다고, 딕은 말했다. 아무래도 딕은 딴소리로 데미안의 주의를 돌리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 이후에도 별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았으니까. 그런 싸구려 감상을 왜 자신에게 들려주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데미안은 딕을 밀어내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의 왼쪽 얼굴은 딕의 품에 완전히 파묻혀있었다. 섬유의 촉감이 볼을 간지럽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데미안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심장소리라는 것이 어떤 건지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귀신처럼 눈치도 빠른 딕 그레이슨은 데미안이 뭘 하는지 곧장 알아채곤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책에서 본 것처럼 콩닥콩닥- 두근두근- 바깥에 들릴 정도로 요란할 것은 없는 소리지만 밀착한 가슴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이고 미세한 박동에 데미안은 왠지 얼굴이 붉어져버렸다. 왜 이렇게 민망한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봐선 안 될 비밀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끌어안겨진 경험은 있지만, 사실 타인의 심장 소리를 그렇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숨소리도 죽인 채 가만히 안겨있는 데미안을 내려보며 딕이 작게 웃었다.


 “오, 데미안도 기분이 편안해졌어?”

 “멍청한 그레이슨, 나는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인공배양기 속에서 자라났단 말야.”


 데미안이 투덜댔다.








 그런 일도 있었지. 침대 위에 누운 데미안은 침대 바깥으로 손을 뻗어 검은 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밤의 패트롤을 대비해 낮잠을 자둘 시간이지만, 초인이 된 이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이 좋아진 데미안은 굳이 휴식을 취해둘 필요가 없었다.


 요 며칠 데미안은 아버지와 함께 패트롤을 다시 돌았다. 다시 다이나믹 듀오의 귀환이었다. 총알조차 튕겨내게 된 보이원더는 강도들의 총을 우그러트리고 단숨에 전봇대에 묶어놓는다. 스스로의 힘에 고양된 로빈은 자기 멋대로 돌발행동을 하려 드는 일이 더욱 잦아졌지만, 그때마다 배트맨의 제지가 돌아왔다.


 그레이슨은 내 개인행동을 존중해줬다고요. 데미안이 꿍얼거릴 때마다 아버지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아차 싶긴 했지만, 딕의 죽음을 전해들은 지 얼마 안 된 데미안과 달리 아버지는 몇 달이나 부재에 적응할 시간이 있었을 테니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하루 동안 네 방에서 반성하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궁시렁대면서도 침대에 누워있는 데미안이었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잠이나 자기로 했다. 악몽이나 꾸지 않으면 좋을 텐데. 편안하게 늘어진 데미안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잠이 밀려들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얼핏 잠에 든 데미안은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채 눈을 감았다. 주변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새하얀 적막 속으로 빠져들기 전, 데미안은 아주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미세한 맥동이었다.


 두근-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데미안은 숨을 삼키며 깨어났다. 


 “그레이슨이... 살아있어?”


 데미안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바람에 침대 시트가 터지며 침대 기둥이 바닥으로 내려앉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데미안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얼떨떨한 감정과 의문과 기쁨과 환희가 동시에 발을 구르며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버지는 그레이슨이 죽었다고 했는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데미안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데미안이 침대를 박살내며 낸 커다란 굉음에 놀란 티투스가 귀를 쫑긋 세우고 데미안을 바라봤지만, 데미안은 애완견의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벙쪄 있었다. 방금 전, 얼핏 잠들었던 데미안은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한번 들은 적 있던 규칙적이고 자그마한 수축음이었다. 바로 딕 그레이슨의 심장 소리.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그저 죽었다 살아난 부작용으로 망상증에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슈퍼파워가 생겼다고 해도 자신이 전세계의 소리를 듣고 그 중에서도 단 한 명의 심장 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수퍼맨조차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딕 그레이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자신이 억지로 만들어낸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자신이 딕의 심장소리를 들었다는 걸 확신했다. 이 지구 어딘가에 여전히 딕 그레이슨이 살아 숨쉬고, 걷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데미안의 얼굴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얼떨떨했지만, 데미안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거대한 북소리처럼 울리는 바람에 데미안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나이트윙을 붙잡아간 크라임 신디케이트의 일과 딕의 무덤이 저택 안에 있단 사실을 말했을 뿐 딕의 최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끼던 전 사이드킥의 죽음에 더 이상 떠올리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데미안은 그 침묵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발각된 딕 그레이슨이 죽음을 가장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배트맨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어디에도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데미안은 어떻게든 딕이 살아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데미안의 얼굴엔 어느새 혼란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그레이슨이 죽었을 리가 없지. 그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오늘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캐물을 것이다. 그레이슨이 죽었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죠? 정말로 딕이 죽었다면 브루스 웨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더하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데미안에겐 피가 이어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정말로 딕 그레이슨이 죽었다면, 아버지가 느낄 절망감은 결코 지금의 모습에 비할 수 없을 거라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기분이라 영 텁텁하긴 했지만, 데미안은 부친을 깊게 신뢰했기 때문에 만약 아버지가 자신이나 알프레드에게까지 딕 그레이슨의 생존 사실을 비밀로 했더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딕을 만나러 가는 것은 그레이슨의 임무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다. 데미안은 그저 아버지에게 딕이 살아있는지 여부만 알아낼 수 있다면 족했다. 자신이 일순간 희미하게 들었던 심장박동이 단지 환청이 아니고, 어딘가에서 살아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든 눈만 감으면 수많은 목소리와 소음 중에서 단 하나의 심박을 들을 수 있다. 쿵- 쿵- 미세하고 일정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만다. 세상은 소란스러웠지만, 그 속에서 단지 그 소리만이 또렷했다. 그래서, 데미안은 양수에 감싸인 아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세상은 일종의 거대한 자궁이었다.


 네 앞에 날아 내려가선 공중에서 네 특기인 3단 회전을 해보이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배트맨.  


 벌써부터 딕의 표정이 기대돼서 데미안은 자면서도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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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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