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며 현대에 사는 데미안이 수백년 전에 성에서 살던 딕의 영혼을 만나는 내용, 딕이 찾던 건 마을 사람들을 해치던 마녀, 마녀는 수백년 동안 살아온 팀 드레이크, 사실 잭 드레이크에겐 자식이 없었음







"이제 곧 할로윈이니까 무서운 이야기라도 해줄까?"

팀이 입을 열었음. 난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 드레이크. 데미안은 코웃음치며 새로 엄마가 재혼하며 생긴 형제 팀을 올려봄. 하지만 팀은 언제나처럼 어린 데미안을 무시하며 혼자 이야기를 시작함.

"우리 가족이 사는 이 낡은 호텔은 옛날에 옛날에 성이었어. 진짜 영주님이 사는 그런 고성말야. 영주님은 냉정하고 말수가 적었고 늘 혼자 고독했대. 그리고 그 영주님은 어느날 마녀에게 홀려 악마가 되어버렸다지. 주민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그래서 결국 화형을 당했대. 영주가 죽고나서 새로 칠한 회벽을 부숴보니 거기엔 수십명의 썩지 않은 시체가. 오늘처럼 비오는 밤에는 지금도 영주님의 영혼이 돌아다니며 희생자를 찾아 악마의 제물로 바친다지. 너처럼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좋고."

"흥, 드레이크. 그런 케케묵은 이야기로 나를 두렵게 하려면 큰 착각이야. 좀 더 똑똑해지지 그래?" 

"겁주려고 한 게 아니라 나도 아버지께 어릴 적 들은 얘기야. 벌써 열한시야. 잘 자. 날 드레이크라 부르는 건 관두고. 너도 이제 드레이크니까. 촛불 켜두고 갈까?"

팀이 물어본 말에 데미안은 또 코웃음을 침. 

"됐으니까 어서 나가지 그래?"

귀여움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데미안의 말에 팀은 어깨를 으쓱임. 

"데미안, 밤엔 돌아다니지 말고 자. 손님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구질구질해. 불꺼진 방에서 데미안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림. 짜증스러워 견딜 수 없었음. 소중한 어머니의 재혼도, 어머니의 재혼 상대 잭 드레이크가 운영하는 이 개인 호텔도, 현재 예일대 경영학과를 다니는 그 아들 팀 드레이크의 존재도.

자기자신도.
내가 좀 더 자란 남자였다면 어머니가 재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난 아직 10살밖에 안 돼서. 둘이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어린 데미안은 자신의 무력함이 분했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아이는 한 팔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훔침. 데미안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음.
아직도 이 낯선 방엔 익숙해지지 않았음. 예전엔 고풍스러운 클래식한 게 취향이었지만 이곳이 잭드레이크의 소유라는 것만으로도 데미안은 이 낡은 호텔이 싫었음. 어머니는 지금쯤 그남자와 같은 방에서 주무시겠지.

한동안 잠 못 이루던 데미안은 문득 팀의 당부가 떠오름. 최상층은 오너인 가족들이 사용하지만 그 아래층들은 관광객이나 손님들이 사용하니까 조심하라고. 하지만 그딴 것 알게 뭐람. 데미안은 바람 좀 쐬고 들어오기로 함. 안 그러면 못 잘 것 같아서.

복도는 어둑했지만 팀이 오지랖넓게 두고간 촛불을 들고 걸으니까 걷기 힘들진 않았음. 데미안은 계단을 걸어내려옴. 앞이 깜깜했지만 넘어지지도 않고 천천히. 그러다 발소리를 들었음. 가볍게 사부작대는 작은 발소리. 빠르게 뛰어다니는 소리를. 아무도 없는줄 알았던 복도에서 타인의 소리가 들리니 순간 등골이 섬칫했지만 데미안은 워낙 겁이 없는 아이라 호기심을 느끼고 이리저리 멀어지는 작은 발소리를 쫓아 뛰었음. 어린애 웃음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음.

호텔의 손님들이 깨든 말든 데미안은 뜀. 한참 뛰다가도 데미안은 몇번이고 발소리를 놓침. 하지만 동물같은 민첩함으로 아슬아슬하게 쫓았음.

웃음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림. 데미안은 약이 올라서 코너를 확 돌며 손을 확 뻗었음. 그리고 거기엔 노랑 망토를 입은 소년이 깜짝 놀란 채 서있었음.

"넌 뭐야?"

데미안이 날카롭게 묻자 노랑 망토에 녹색 아이마스크를 쓴 이상한 무대 공연 의상의 아이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확 뻗어 데미안의 입을 틀어막음. 

"쉿, 조용히 해."

데미안은 아이의 손을 떨치려고 했지만 걘 몸은 마른 주제에 힘이 참 셌음.

"조용히 해줄 거지? 난 로빈이야."

아이가 손을 떼며 숨죽여 자신을 소개함. 

"난 데미안."

데미안은 퉁명스레 또래의 소년을 봄. 저런 비리비리한 녀석이 자기보다 힘센 게 자존심 상하지만 호기심이 먼저였음. 

"넌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데미가 물어봄. 

"나는 사실 이곳에 지내는 사람 하나를 조사하러 왔어. 범죄와 연루되었다는 의심이 있거든."

로빈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함. 

"네가 뭐길래?"

데미안이 퉁명스레 묻자 로빈의 눈이 커짐. 

"세상에. 넌 어떻게 배트맨과 로빈을 몰라??"

바보를 보는 듯한 시선에 데미안은 순간 자존심이 좀 상했음. 데미안이 고담에 살게된 건 한 달도 안 된 기간인데. 그러고보니 아침 식사 시간에 팀이 그 아버지랑 시사면을 읽으며 배트맨 어쩌구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로빈은 자신이 자경단원임을 말해줌. 

"자경단원? 그런 쓸데없는 걸 왜하는 거야. 바보냐?"

시니컬한 질문에 로빈은 뾰로퉁한 얼굴을 하는 대신 방긋 웃었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정의를 위해서 싸우기로 나는 맹세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 그보다 넌 위험하니까 이만 돌아가렴."

배트맨과 자신이 뒤쫓는 살인마는 위험하니까 돌아가라고 로빈이 말하자 데미안은 자존심이 상했음. 

"넌 나랑 또래잖아."

"그야 난 훈련받았지만 넌 안받았으니까."

딕의 말에 데미안은 잠시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심술궂게 씩 웃음. 

"날 두고 가면 소리질러서 다 깨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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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브루스는 오래되고 강력한 온혈흡혈귀, 그 아들 데미안 웨인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를 빤 적이 있어서 냉혈흡혈귀지만 지금은 개심, 팀은 세이렌, 제이슨은 늑대인간

*연반설정




웨인가의 저택에 들어간 아이 중 돌아온 사람은 없어. 으레 어둡고 오래된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는 태도로 사람들이 쉬쉬하며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소문이 없더라도 높은 동산 위에 위치한 웨인저택은 낮에도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 동네에 사는 어린애들 중 웨인가의 사유지에 들어가는 아이는 없었다. 그때까지는.

웨인저택에 얽힌 수많은 소문들을 떠올리며 검은 머리 소년, 딕은 옛날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의 궁전처럼 우중충한 저택 정문을 올려보곤 침을 삼켰다. 지하실에 사람 잡아먹는 식인귀를 키운다는 소문을 믿을 만큼 어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두운 괴담들에 완전히 자유로울만큼 성숙하진 못한 나이였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딕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떠올렸다. 딕은 망해버린 할리 서커스단의 소유주였다. 딕이 받은 서커스단은 재산이라기보다 단장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떠넘기고 간 짐덩어리에 가까웠지만 딕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매일 열심히 늙은 서커스 동물들을 돌보고 낡은 놀이기구를 손보았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자리잡은 공터는 웨인가의 사유지였고, 삼일전 관리인에게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고 유일한 단장이자 단원인 여덟살 소년은 이 상황을 해결할 돈도, 법적 지식도 없었다. 어차피 놀려두는 공터니까 저택 주인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부탁하면 되겠지. 세상 모르는 아이의 발상이란 겨우 그 정도였다. 

딕은 옷 트렁크에서 가장 단정해보이는 셔츠와 반바지를 꺼내입고 멜빵까지 맸다. 머리는 물을 묻혀 뒤로 전부 넘겼다. 이만하면 돌아가신 엄마도 자랑스러워하실 모습 같았다.

사실 딕은 굉장히 긴장해있었다. 소문 무성한 웨인 저택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어린애를 보면 지팡이를 휘두르는 괴팍한 노인만 아니면 좋을 텐데. 

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저택의 노집사가 나왔다. 

"미리 약속하고 오셨습니까?"

"아뇨."

"주인님께는 무슨 용건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집사는 딕을 흘끗 보곤 소년을 정중히 응접실로 안내했다. 

"주인님은 잠시 회사 일로 외출하셔서 곧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아무 것도 만지지 마시고 다른 방에도 절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간단한 간식을 가져다준 집사는 몇 번이고 당부한 후에 사라졌다.

딕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지만 남의 집에서 맘대로 돌아다니는 예의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귀찮으니까 여기부터 썰로. 




딕이 혼자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며 과자 오독오독 씹어먹는데 갑자기 창 밖에서 무거운 게 질질 끌리는 소리와 크릉거리는 짐승 소리가 들림. 딕은 조심스레 밖을 내다봤음. 거기에 커다란 늑대가 발목에 매인 덫 때문에 피를 줄줄 흘리며 정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음. 딕은 놀라서 숨을 삼키며 얼른 창문 뒤로 숨음. 근데 늑대가 바닥에 철푸덕 쓰러지는 소리가 들림. 

딕은 잠시 시계를 보고 고민하다가 후다닥 나와 정원으로 나감. 아까전 자리에 늑대는 없었지만 피가 바닥에 줄줄 흘러 자국을 남기고 있었음. 딕은 핏자국을 따라감. 분수대 앞에 누운 커다란 회색 늑대가 혀를 빼물고 물을 할짝대고 있다가 딕의 발소리를 듣고 이를 드러내며 크릉거림. 보통 아이같으면 집채만한 늑대에 놀라 벌써 도망갔겠지만 딕은 서커스단의 맹수들을 돌보고 교감하는데 익숙해져 이런 늑대를 봐도 전혀 겁먹지 않았음.

"발목에 덫을 풀어주려고 그래."

딕이 침착하게 말했고 늑대는 여전히 크릉거렸지만 딕이 천천히 원을 좁혀 다가오는 것에 더 적대감을 내보이진 않았음. 아주 늦은 속도로 딕이 늑대의 지척까지 왔을 때 늑대는 딕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음. 딕은 긴장하면서 손을 뻗어 늑대의 상처입은 왼쪽 앞발을 건드렸음. 늑대가 펄쩍 뛰며 으르렁댐. 그치만 나이든 사자를 키우고있는 딕에겐 '널죽여버리겠다닝겐'이 아니라 '살살잡아씹새야' 같은 뉘앙스 차이가 들려서 안심하면서 조심조심 덫을 잡아 벌려 늑대의 발을 풀어줬음.

상처는 매우 깊고 아파보여서 딕은 자기도 모르게 윽 하고 질린 소리를 냄.

이제 발이 자유로워진 늑대가 고개를 들고 딕의 목덜미를 확 잡아 물었음. 상처내지 않게 살짝 물었다 놓은 늑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깊은 곳으로 달려가버렸음.

딕은 조금 얼떨떨한 심정으로 응접실에 돌아옴. 손에 늑대의 피가 잔뜩 묻었는데 화장실이 어딘지 몰라서 손을 씻을 수도 없었음. 손이 지저분해져서 과자도 못 먹고 딕이 멀뚱거리며 있는데 우당탕 소리가 나며 성큼성큼 발소리가 가까워짐. 

갑자기 문이 확 열리고 넥타이를 풀며 날카로운 인상에 머리가 짧은 남자가 들어와 딕을 아래위로 훑어봄. 

"네놈이 아버지를 찾아온 녀석이냐?"

사내가 성난 얼굴로 딕을 노려보고 눈이 마주쳤을 때 딕은 뱃속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음. 아까 거대한 늑대를 보고도 태연하던 딕은 그대로 기절함 




"아 미친 형새끼야 어린앨 괴롭혔냐?"

"괴롭히긴 무슨, 손가락 하나 안 댔는데 저 쥐좆만한 애새끼 혼자 넘어갔거든?"

"뻥까시네! 인간아인간아 철 좀 드세요. 게다가 어린애보고 못하는 소리가 없네."

막 목소리높여 싸우는 소리가 들림. 딕은 푹신한 침대에서 정신을 차림. 

"쉿, 애 일어났다."

차분한 목소리도 들려옴. 눈을 떴을 때 딕의 옆엔 휠체어에 앉은 하얀 피부의 청년이 있었고, 그 앞엔 아까 딕이 보고 기절한 덩치큰 남자랑 사납게 생긴 긴 후드티의 고등학생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음. 이상하게 아까만큼 무서운 기분은 들지 않았음. 

둘째 팀이 몸은 좀 괜찮냐고 물어와 고개를 끄덕임. 아마 이 사람이 이곳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 같아서 마음이 놓였음. 연이어 제일 키 큰 남자 데미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딕에게 왜 여기 왔냐고 물었고 딕은 브루스 웨인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말함. 

"뭔데? 나한테 말해봐."

자기가 브루스의 아들이라며 데미안이 나섬. 딕은 자기 사정을 얘기했고 아직 여덟살밖에 안 된 애가 서커스단을 맡아 혼자 살고있단 말에 다들 놀람. 

"안 됐네, 좀 살게해줘라."

눈매 사나운 고딩 제이슨이 아까부터 왼쪽 소매에 가린 손목을 문지르며 툭 내뱉음. 제이슨은 성깔있어 보였지만 아까부터 은근히 딕에게 호의적으로 굴고있었음. 보통 타인에게 까칠한 제이슨 답잖은 태도에 데미안은 딕 손에 말라붙은 피를 힐끗 보고서 상황을 파악했음.

하지만 가장 상냥해 보이는 팀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함. 

"사정은 딱하지만 그렇게 모두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어. 아무 대가도 없이 웨인가에 손을 벌리는 사람은 많아. 그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진 못해."

"그치만..."

딕은 우물거리다 입을 다물었음. 데미안은 못되게 생긴 얼굴에 비해 잔정이 많은지 팀이 어린애에게 딱 잘라 거절하자 본인도 놀란 표정으로 팀을 돌아봄. 제이슨은 아예 대놓고 '와, 인간도 아냐' 하는 시선임. 하지만 딕이 쓰고있는 땅 임대료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분명했음. 여태 쓴 사용료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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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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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난 딕을 좋아해.”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말은 울 것 같은 목소리도,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는 제법 예민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말이 여느 때와 같은 친애 표시의 일종인 줄로만 알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동생은 평소에도 제 친구랑 마이클론보이니 마이로빈같은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서로를 불러댈 만큼 (만약 어느날 팀이 슈퍼보이의 손을 잡고 웨인저에 들어와 결혼하겠다고 공언해도 경악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알프레드와 미리 말을 맞춰둔 적도 있었다) 여느 사내애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딕이 보기에 팀은 대범하고 자신감 가득한 성격 일면에 조금쯤 소녀스러운 구석-딕이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주변 여성들 중에도 소녀스럽다는 표현을 붙일 사람은 없었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 팀의 고백은 단번에 본뜻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딕이 웃으며 대답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나도 네가 좋아.”
 하지만 팀은 여상스럽고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냐.”
 담담하지만 열띤 푸른 눈동자에 딕은 순간 가슴이 덜컥하며 현재 상황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지금껏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지만, 팀은 지금 자신에게 고백을 하고 있었다. 팀은 침착했고, 여느때보다 점잖았다. 또 그렇게 보이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을 믿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리한 동생으로 보는 연상의 성인에게 한 사람의 당당한 개체로 보이는 덴 많은 허세와 용기가 필요했다. 팀은 더욱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딕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딕은 부드러운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점을 놓치기엔 소년의 관찰력이 너무 뛰어났다.
 많이 놀랐나 보네. 지금껏 충분히 티가 났다곤 생각하는데 팀의 태연함을 가장하는 연기력은 본인 평가보다 뛰어난 모양이었다.
 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꼭 지금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사귀어달라는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알고 있었으면 해서 말한 거니까. 만약 부담스럽다면-”
 “아냐, 부담스러운 게.”
 혹시나 팀이 상처입을까봐 딕이 빠르게 대답했다. 딕이 그리 넓지 않은 제 울타리 속 사람에게 유독 너그럽단 것을 팀은 잘 알았다. 그 바운더리 안에 들어와있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니까. 예상대로였고, 팀은 딕이 자신을 받아주진 받아주진 못할 망정 혹시 호모포비아라고 해도 팀을 꺼려하지 못하리란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팀은 지금처럼 고백한다고 해도 잃을 것이 없었다. 희망적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희박한 가능성으로 자신을 받아준다면 그것으로 좋고, 거절한다고 해도 수많은 전애인들과 조금의 껄끄러움도 없이 얼마나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는지 알기 때문에 별 걱정 없었다. 방금 한 말대로 팀은 그저 딕이 알아주기만을 바랐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을 상대로 가슴 뛴다는 것을. 어떤 타산적인 욕심도 없이 그저 그것뿐이었다.
 “응, 알아.”
 “난 전혀 몰랐어. 네가 날...”
 “그것도 알아.”
 평소같은 팀의 표정에 딕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넌 진짜 모르는 게 없구나. 난 로빈이잖아. 태연한 대답에 딕이 혀를 내둘렀다.
 “그럼 난 루시우스씨와 약속이 있어 가볼게.”
 바로 돌아서는 팀의 모습에 딕은 황당함을 느꼈다. 보통 녀석이 아닌 건 알았지만 풋풋한 십대 남자애 주제에 방금 고백해놓고 저 정도로 태연하게 구는 게 가능해? 하지만 딕은 곧바로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는 팀의 귀를 발견해버렸다. 귀여운 녀석. 아마 빨리 자리를 뜨기 위해 일부러 빠듯하게 약속 시간을 잡아 두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기분이 유쾌해진 딕은 팀의 뒤를 따라 빨리 걸으며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대답도 안 듣고?”
 “딕... 나 지금 늦을 것 같아.....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난 대답을 들으려고 고백한 게 아니-”
 “됐고 얼른 다녀오기나 해라. 갔다오면 말해줄게.”
 팀은 고개를 끄덕였다. 흰 목덜미도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팀은 딕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후에 이때의 순간에 대해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끊임없이 되새겨 생각할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때 만약 폭스와의 약속에 늦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만약 딕에게 대답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을까. 하지만 출제자가 사라진 문제의 정답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었다.





02


 안녕, 딕? 나야.
 오늘은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바빴어. 회사에서 직업박람회를 열었고 회장 대리로서 거기 잠시 들렀는데, 박람회장에 미스터 프리즈가 난입해서 사람들을 공격했거든. 난 그때 허벅지만 조금 얼었는데 레슬리에게 금방 치료받은 덕분에 문제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미스터 프리즈와 싸운 것은 '로빈'이야. 내가 아닌 다른 로빈.
 이렇게 이야기하면 딕은 놀라겠네. 딕이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브루스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형도 몰랐을 것 같네. 탈리아 헤드가 브루스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나봐. 벌써 열 살이래. 오랫동안 감추고 있던 거지. 확실히 하기 위해 친자확인 검사도 해봤는데 맞아. 걘 리그오브어쌔신에서 자랐는데 처음엔 나를 죽이려 들었고, 그리 유쾌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로빈 자리에서 나온 난 독립했어. 원래는 아예 웨인저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브루스가 죽은 것처럼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로빈'과 함께 고담을 지켰지. 브루스가 돌아온 지금은 다시 혼자야. 
 오늘 로빈이 나보고 웨인저택에 돌아오라고 했어. 얘기 안했던가. 나 지금은 따로 아지트를 만들어 나와서 살고있거든. 아무튼 걘 나보고 형을 포기하라고 했어. 이미 죽은 녀석에게 집착하지 말라더라. 순간 정말 화가 나서 그녀석에게 무슨 짓이든 해버릴뻔 했는데 브루스가 먼저 화내줬어. 
 아무도 나에게 딕 그레이슨을 포기하라고 할 순 없어. 감히, 어떻게... 지금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나라고 단언할 수 있어. 다들 네가 죽었다고 하지만 난 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
 딕, 너는 어디 있는 거야? 
 보고싶어.


 나이트윙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둑한 CCTV 속에만 그의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뱃케이브에 홀로 서있던 나이트윙, 그런 그의 뒤로 커다란 흰 손이 나타났다. 희게 빛날 것처럼 새하얀 손은 나이트윙의 목을 잡고 확 잡아끌어 끝없는 어둠속으로 추락시켰다. 어떠한 징조도 없이 그저 나타난 흰 손이 딕을 잡아챘을 때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충분히 단련된 성인 남자였는데도 헝겊인형처럼 힘없이 끌려가 동굴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후 뱃케이브 바닥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지만 배트맨들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심지어 슈퍼맨조차 고개를 저었고, 그 흰 손에 어떤 마법적인 능력이 깃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자타나도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갔다. 세계 최고의 탐정 배트맨도 흰 손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고, 그의 첫번째 아이 딕 그레이슨의 자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는 조사 끝에 결론이 나는데 삼년이 흘렀다. 

 딕 그레이슨 26세 사망. 
 그리고 팀 드레이크는 유일하게 딕의 생존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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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아무래도 그의 손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긴 손가락이 집어 들던 연한 형광 연두색의 작은 별이었다. 데미안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날이었다. 버석거리는 나뭇잎이 발치에 뒹굴던 그런 가을날, 그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데미안의 방에 들어왔다. 노크 좀 하지. 벽에 기대어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던 데미안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짤막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웃음을 흘리며 데미안의 앞에 걸어와 손을 들이민다. 아무리 봐도 절대 얌전히 물러나진 않을 것 같은 철없는 어른의 접근에 소년은 결국 책을 내려놓고 눈길을 주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양손 가득 담겨있는 별을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별이라곤 해도 진짜 별똥별의 조각은 아니었다. 흐릿한 연두색의 별들은 끝이 뭉툭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어린 꼬마들 방 천장에 붙어 있음직한 야광별이었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찬 별 무더기를 본 데미안은 그에게 이게 뭐냐는 시선을 보내며 혀를 찼다.

 

 “그레이슨, 나 책 읽고 있어.”

 

 방해 좀 하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하며 데미안이 다시 책을 들자, 야광별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는 데미안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밀어 넣더니 옆구리를 잡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으켰다. 그레이슨 너 미쳤어? 소년은 그런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리그 오브 어쌔신에서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소년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손길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의 친애의 접촉은 낯설기만 했다. 하물며 주요 장기가 모여 있는 몸통에 대한 접촉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상대가 그라는 자각이 없었다면 오랜 기간 몸에 밴 습관대로 반사적으로 베개 안에 숨겨둔 쿠쿠리를 꺼내 경동맥부터 그어놓고 봤을 것이다. 따뜻한 손의 온기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신의 몸을 잡고 있다는 감각에 긴장한 데미안은 경직되어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 안에서 뻣뻣하게 굳은 촉감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끌어안고 달래듯이 이마에 쪽 쪽 소리 내어 가볍게 키스했다. 간지러운 감촉에 데미안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경계어린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그는 또 그런 데미안이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아이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싫을 정도로 느껴지는 체격차에 데미안은 작게 툴툴거렸다.

 

 “그래서 왜 온 건데?”

 

 내 시간 방해하려고? 저 우스꽝스러운 것들은 뭐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쫑알대는 데미안의 질문에 그는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별을 하나 집어 들고 데미안의 얼굴 앞에 이리저리 움직여보였다.

 

 “이게 뭐게?”

 “뭐하자는 수작이야.”

 

 귀엽지 않은 말투에도 그는 자신보다 열 살 터울도 넘는 어린 동생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즐겁게 대답한다.

 

 “별이야.”

 “보면 알아. 그걸로 뭘 하려고.”

 “천장에 붙이자.”

 

 보는 사람이 아연해질 정도의 상큼한 미소에 데미안은 잠시 할 말을 잊고 가만히 그를 올려보다 중얼거렸다.

 

 “알프레드가 화낼걸.”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데미안의 방에 한가득 별을 붙였다. 처음 시작이야 데미안이 그의 억지에 넘어간 모양새였지만 일단 벽에 야광별을 붙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아이 쪽이 더 신나서 정신이 없었다. 데미안은 먼저 심각한 눈으로 입을 꾹 다물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그리곤 열띤 얼굴로 여기저기 지휘봉을 쥐고 지시했다. 그레이슨, 저기! 저기다 그 3cm짜리 붙여. 바보, 그렇게 하면 도마뱀자리가 아니잖아. 어휴 답답해. 이리 내! 소년은 결국 답답했는지 남자의 손에서 별을 왕창 뺏어다가 자신이 나서서 제 방을 가을 밤하늘로 만들고 있었다. 페가수스,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 백조, 도마뱀, 삼각형자리 등등. 소년은 별의 밝기에 따라 크기까지 골라가며 은근히 본격적인 별자리들을 만들어갔다. 기껏해야 천장에 별 몇 개 붙이는 상황만 상상했던 남자는 미소를 띠며 어린 동생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종국엔 밤하늘의 별들을 다 만들기도 전에 그가 가져온 별이 동나버렸다. 데미안은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고작 50개밖에 안 가져와서는.

 

 아직 낮이었기 때문에 커텐을 쳐도 야광별이 빛나는 것을 보긴 힘들었다. 대신 그는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저녁에 패트롤 돌고 와서 같이 보자.”

 

 바보, 여긴 내 방이야. 구경하고 싶으면 내 허락부터 맡아. 데미안의 말에 그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톡 톡. 최상 속의 어린 소년이 아니라 이제 성장한 소년- 아니 소년이라기엔 청년에 가까운 용모의 데미안은 소파에 드러누워 작은 위치추적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금물에 빠져 고장난 위치추적기는 아무리 손을 댄들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데미안은 무료함 속에서 뭔가 만지작거릴 것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데미안은 6년 사이에 부쩍 커졌다. 열네 살엔 매일 팔꿈치와 무릎이 아파서 잠도 깊게 잘 수 없었다. 성장통이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눈에 띄게 변화가 보였다. 목소리가 허스키해지기도 했고, 어깨도 넓어졌다. 멀리서 데미안을 본 사람이 언뜻 데미안의 부친으로 착각하고 부르는 일도 한두 번 있었다. 소년은 빨리 크는 편이었다. 아직 완연한 성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데미안은 벌써 팀의 키를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엔 소년의 정신이 몇 발짝 더 빨리 어른스러워졌다. 데미안은 더 이상 팀 드레이크를 상대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6년간의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공존에 대해 배우게 해주었고, 그들은 여느 평범한 집안의 사이 나쁜 형제들처럼 적당히 데면데면하고 적당히 서로를 무시하며 적당히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에 대해 그는 퍽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너희가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텐데. 온 가족이 함께 모인 거실에서 팀은 못 들은 척 했고, 데미안은 시끄럽다며 퉁명스레 딕의 말을 일축하곤 했다.

 

 지금도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키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고양이같이 살금거리는 발소리가 제 앞에 다가와 어깨를 흔들어 깨울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데미안은 결국 영영 고쳐질 리 없는 작은 기계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데미안뿐이었다. 오늘은 다들 외출했다. 그건 그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평범한 연애라면 늘상 해오던 그가 최근 요리 잡지에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 프랑스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해가며 가족들을 부른 이유는 그 상대가 여느 때와 달리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여자를 데려와 결혼할 상대라고 소개하겠지. 데미안은 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딕이 잡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지금 거실에 누워 혼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만 봐도 바쁘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딕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회사 일 때문이라고 하는 데야 별 수 없었다. 데미안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걸 옆에 있던 팀이 힐끗 바라보았다. 데미안이 말을 지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팀은 의외로 별 말 하지 않고 딕을 축하해주었다.

 

 데미안은 푹신한 쇼파에 머리를 댄 채 천장을 가만히 올려보았다. 아직도 제 방 천장엔 야광별이 붙어있다. 지금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온 집안이 그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기둥에 대고 데미안의 자라는 속도를 기록해준 것도 그였고, 장식장 안에 작은 오르골을 넣어둔 것도 그였고, 거실 벽난로 위엔 그를 포함해 온 가족을 그린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의 체향이 가득 밴 털실꾸러미 속에 온 몸이 잠겨버린 기분이다.

 

 언제나 가을철 별자리만을 보여주는 제 방은 별을 붙인 그 시점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못박아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시간은 결국 어린 때의 추억들에 머물러 있었다. 제 유치하고 어리숙한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색색의 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아름다운 햇살처럼 그는 데미안에게 언제나 찬란하고 빛나는 사람이었다. 이런 표현 같은 거 유치해서 생각하는 일조차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하늘을 가볍게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수조 속을 유영하는 희귀한 열대어처럼 반짝거렸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좋아해왔는지는 대답할 수 있다. 그가 제 손목을 잡을 때 아이는 가슴이 뛰었고 자기가 왜 두근거리는지조차 알 수 없어 괜히 심통을 부렸더랬다. 그가 칭찬해주는 게 좋았다. 아버지의 칭찬을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칭찬에 헤픈 남자였지만, 그의 다정한 말은 언제나 소년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데미안은 괜히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곤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릴 땐 커다랗게만 느껴진 쇼파였지만 지금은 데미안이 누우면 발목까지 바깥으로 쑤욱 나와 버렸다. 자신은 성장했지만, 제 맘은 언제나 제자리에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바보 같은 그레이슨. 언제까지나 제 다정한 형으로 옆에 있어줄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애초에 손 안에 움켜쥘 수 있는 대상조차 아니었다. 딕은 한 번도 자신을 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거기에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사람의 것이 될 딕을 생각하고 이렇게 가슴이 지끈거리는 것을 보면 자기기만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데미안은 열 살 때 이후로 처음으로 코를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그레이슨.”

 

 이런 식으로 우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제 안의 나약함을 오롯이 드러내며 어깨를 떠는 데미안의 손에 커다란 개가 머리를 대고 비빈다. 타이투스, 착한 녀석. 그레이트 데인은 제 젊은 주인을 위로하듯 아무 말 없이 그저 체온을 빌려주었다.

그때, 거실 안에서 타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데미안의 어깨가 굳었다. 타이투스가 귀를 쫑긋 대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낯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상대가 나빴다.

 조금 피로한 표정으로 팀 드레이크가 거실을 지나치며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빠르게 걷던 팀은 쇼파에 드러누워 있는 데미안을 발견하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데미안은 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충혈된 눈가를 금방 가렸는지는 그리 확신할 수 없었다. 얄미운 녀석.

팀은 데미안을 놀리는 대신 핀잔을 주었다.

 

 “네가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니까 정말로 무역 건에 문제가 생겼잖아. 식사도 다 못했어.”

 “거기 있다 중간에 온 거야?”

 

 데미안이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묻자, 팀은 넥타이를 다시 채우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엔. 데미안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쇼파 등받이 부분에 턱을 얹고 팀의 뒷모습을 향해 충동적으로 물었다.

 

 “걔 예뻐?”

 

 밑도 끝도 없는 남자애다운 질문에 팀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곤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그렇게 예쁘진 않더라. 근데도 딕은 껌뻑 죽었지만.”

 “, 그레이슨은 원래 눈이 낮아."

 "그런가"

 

 데미안은 조금 심통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데미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팀이 어느새 앉아있는 데미안의 뒤에 섰다. 허리를 굽힌 팀은 데미안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쓸며 일상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도 별로 취향 좋은 것 같진 않지만.”

 

 제 머리를 쓰다듬다 뒷목을 느릿하게 스치고 지나간 손가락에 데미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잠깐의 접촉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은밀함에 대해선 그 손길이 닿은 장본인이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예상치도 못한 상황 때문에 반응이 한 박자, 아니 몇 박자는 족히 늦어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당황한 목소리로 팀의 이름을 불렀을 땐, 팀은 이미 저택을 나가 회사로 향하고 없었다. 팀의 검지가 쓸고 지난 목덜미가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데미안은 멍하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저 녀석……,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한 거야? 단조로운 일상이, 평범한 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작은 계기로 충분하다는 것을 데미안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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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

숲딕) sweets

연성/完 2013.12.01 20:52
*딕른 교류회 판토 리퀘로 쓴 데코플
*DC comics 숲딕
*연반설정
 
 
 


 갸름한 턱에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동그란 볼, 커다란 푸른 눈동자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숲스."
 
 아이의 눈은 생기있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장난을 좋아하는 명랑한 아이는 그 동그란 머리 속에 늘 이런저런 수십 가지 기발한 생각들을 보물상자처럼 감춰두고 있곤 했다.
 자그마한 입술이 달싹이며 다음 말을 이어 내뱉는 모습, 남자는 그 모습에서 작은 경이로움까지 느끼며 아이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집중한다. 아니 사실, 그는 지금만이 아니라 언제나 아이의 숨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저 부탁이 있는데요."
 
 뭐든 말해보렴. 네 부탁이라면 뭔들 못 들어줄까. 네 작은 고사리 손 가득 우주에서 갓 따온 반짝이는 별조각을 쥐어다주랴, 이곳저곳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네가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네 발 밑에 지금껏 인류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드높은 절벽의 만년설을 가져다 융단처럼 포근하게 깔아주랴, 네 두 눈과 똑같이 닮은 보석을 찾아 네 귀에 걸어주랴. 남자는 아이의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기분 좋게 즐기며 말없이 미소지어 보였다.
 
 "케이크 만드는 거... 도와주지 않으실래요?"
 
 하지만 이어 나온 부탁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남자의 예상 범위를 한참이고 벗어났다.
 
 다음날이 브루스 웨인의 생일이라고 아이는 말했다. 딕은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그렇게 되묻자, 아이는 동그란 눈을 즐거움으로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알피는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스럽고, 데미안은 세상에서 제일 세요! 팀은 제일로 잘생겼고, 또, 제이슨은 어어엄청 용감해요. 남자는 즐겁게 자기 가족 자랑을 늘어놓는 아이의 모습을 웃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딕의 뺨이 또 새빨개졌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금세 시선을 내리깔았다. 뺨 위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다.  
 
 딕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나빠요. 제일 나빴어요."
 
 지금까지 딕에게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고, 손 한 번 든 적 없는 남자로서는 황당한 말이었다. 여태 그는 웨인 저택에 찾아갈 때마다 브루스의 차가운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커다란 손 가득 과자와 젤리 따위를 잔뜩 챙겨갔으며 셋째 제이슨과 싸우다 분해서 씩씩대고 있을 땐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준 적도 잦았다. 슈퍼컴퓨터에 맞먹는 기억력으로 자신의 과거 행적을 전부 되짚어봐도 아이에게 원망받을 일은 단 하나도 한 적이 없는데 나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호인인 클락이라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딕,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니?"
 
 클락은 보통 사람보다 너그럽다거나, 업무 능력이 뛰어나단 평가는 종종 들었으나 눈치 빠르고 세심하단 평가는 들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로선 딕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아이를 타박하기보다는 자신이 미처 배려하지 못한 부분에서 뭔가 미움받을 짓을 했거니 생각이 들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곤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딕의 손은 클락의 팔을 꼭 부여잡은 채다.
 클락에겐 절대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단호한 대답에 클락은 조금 서운해졌지만 천성이 따스한 사람답게 이번 케이크 만드는 작업을 도우면서 잃어버린 점수를 만회해야겠다는 낙천적인 발상 쪽으로 금세 발상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생크림을 묻힌 아이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에 닿아오는 모습을 클락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만 먹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대륙을 횡단해 다녀올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어린애의 동작 정도는 늘어진 비디오마냥 느릿하게 보였지만, 남자는 고개를 틀어 손가락을 피하는 대신 제 볼에 보드라운 촉감이 닿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는 클락의 볼에 생크림을 묻히고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 얼굴에 생크림 묻었대요! 자기가 생크림을 묻혀놓고 깔깔대는 짓궂은 모습에 클락은 딕의 허리를 단숨에 안아들고 다른 손에 생크림을 찍었다.
 
 요망한 장난꾸러기의 얼굴에도 생크림을 묻혀주려고 하던 클락은 멈칫했다. 딕은 숨도 멈추고 클락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바짝 굳어 남자의 팔에 들려 있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에 당황한 클락은 어른답지 못하게 반격하려고 했던 것이 민망해져 생크림이 묻은 왼손을 등뒤로 감추며 딕을 내려주었다. 
 
 바닥에 다시 내려선 딕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몸을 돌리곤 아무 말도 없이 빵 위에 크림을 얹었다.
 
 클락은 머쓱해져 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에 있는 작은 의자에 커다란 덩치의 몸을 적당히 구겨 앉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선 딕의 숨소리는 여전히 천식에 걸린 사람처럼 새근거렸고 이쯤에서 클락은 딕의 호흡기, 혹은 자그마한 심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해도 딕의 심박은 다른 사람들보다 빨랐고 체온도 미열이 있는 것처럼 높았다. 브루스는 딕의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저 작은 체구로 방어엔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얄팍한 코스튬을 입고 밤 거리에 나서는 것이 걱정되는데.
 
 지금까지 배트맨의 곁을 따르던 역대 사이드킥들과 달리 딕은 '로빈'이라는 자신만의 히어로명을 고집했다. 몸을 보호하는 단단한 특수섬유 재질의 코스튬 대신, 최대한으로 몸을 가볍게 만드는 디자인을 원했고 그 단호한 브루스를 끈질기게 설득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까지 했으니 보통 꼬맹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클락은 약간의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딕의 허리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선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얇은 다리로, 저렇게 작은 발로 어떻게 총알 앞에 몸을 내던지며 범죄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거지. 브루스가 처음 자신의 아들 데미안을 사이드킥으로 삼았을 때도 클락은 아이가 자경단 일을 하다 다치지나 않을까 우려했지만 리그오브어쌔신에서 훈련을 받고 자란 데미안은 수퍼맨의 조언을 콧방귀뀌며 무시했을 뿐더러 자신은 강하다 호언장담하는 말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클락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것도 노파심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댁 신변이나 조심하시죠, 외계인. 언젠가 어린 데미안이 이죽이던 말을 떠올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등 뒤로 예민하게 클락의 시선을 느끼고 있던 딕이 뾰족한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클락, 벌써 지친 거예요? 아직 딸기 장식은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만 쉬고 있고."
 
 아이의 불평에 클락은 이크 하며 벌떡 일어나 커다란 손으로 깨끗하게 씻어둔 딸기 그릇을 쥐었다. 돈을 아낄 필요 없는 웨인가인만큼 딸기는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클락이 황급히 케이크 위에 딸기를 올려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클락을 불렀다.
 
 "아저씨, 잠시만요."
 "응?"
 
 허리를 숙이고 케이크를 장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클락이 고개를 돌렸을 때, 딕은 까치발로 있는 대로 발돋움하며 클락의 목에 매달려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짝 와닿은 입술이 열리며 자그마한 혀가 남자의 볼에 묻어있던 생크림을 훔치고 달아난다. 클락은 갑작스런 키스에 손을 멈추었다.
 
 클락의 뺨을 할짝이자마자 떨어진 딕은 시선을 떨군 채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꿍얼댔다.
 
 "그, 그냥 장난쳐본 거예요."
 
 변명하긴 했지만 도저히 부끄러움을 누를 수 없던 아이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쏙 뛰쳐나가버렸다. 십분이 지나도, 삼십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모습에 클락은 그제야 딕이 도망쳐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린애들의 생각은 종잡을 수 없다곤 하지만, 유독 딕에 한해서 클락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장난꾸러기인가 싶으면, 어느 한 순간 눈이 아플만큼 예뻐보이고, 뻔뻔한가 싶으면 또 금방 소녀처럼 수줍어 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짤랑대는 고양이 목걸이 방울같은 모습에 클락은 아이에게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던 볼이 간질거렸다. 클락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싸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식당에 들어왔다가 멍하니 서있는 클락의 모습을 발견한 팀은 식탁 위를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남의 집에 온 덩치 큰 손님 혼자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이 광경이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추리해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태연히 중얼거렸다. 딕에게 예쁨받으시는 것까진 아무래도 좋지만, 그쪽에서 애를 예뻐해주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팀의 말에 남자의 커다란 등이 굳었다.
 
 "하하, 신고할 거예요, 수퍼맨."
 
 흰 셔츠의 청년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을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클락을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인 팀은 그대로 식당을 나가버렸고, 자리에 홀로 남은 클락은 침음성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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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연화 로키도티르